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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實 第六

제6편 虛와 實


虛實者는 彼我皆有之하니 我虛則守하고 我實則攻하며 敵虛則攻하고 敵實則備하나니 爲將者 要知彼我虛實之情하여 而爲戰守之法耳니라

虛實이란 적과 우리가 모두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虛하면 수비하고 우리가 實하면 공격하며, 적이 虛하면 공격하고 적이 實하면 수비한다. 장수 된 자는 적과 우리의 虛實의 실정을 알아서 싸우고 수비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


孫子曰 凡先處戰地而待敵者는 佚하고

孫子가 말하였다.

무릇 먼저 싸울 장소에 있으면서 적을 기다리는 자는 편안하고,

孫子言 凡先處形勢之地하여 而待敵人之來면 則士馬閑佚하여 而力有餘하니 如趙奢先據北山하여 以待秦兵之至1)하고 段昭結陣하여 以待突厥之至2) 是也라

1) 趙奢先據北山 以待秦兵之至:B.C. 270년, 秦나라가 韓나라를 치기 위해 閼與로 진군해 오자, 趙王은 趙奢를 將軍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보냈는데, 趙奢가 먼저 달려가 北山을 점거해서 秦軍을 대파하고 閼與를 구원하였다. 자세한 과정과 戰術은 83쪽 주 1) 참조.

2) 段韶結陣 以待突厥之至:段韶([〜571)는 南北朝時代 北齊의 名將이다. 562년에 北周가 羌夷․突厥과 연합하여 洛陽을 습격하자, 北齊의 世祖 武成帝는 段韶로 하여금 이들을 막게 하였다. 이때 마침 큰 눈이 내렸는데, 段韶는 휘하의 기병 200명을 거느리고 諸軍과 함께 邙阪에 올라가 北周軍의 형세를 관찰한 다음 大和谷에 이르러 北周軍과 조우하였다. 段韶는 즉시 파발을 띄워 諸營에 통보하고 兵馬를 추가로 모아서 곧장 諸將들과 함께 布陣하고 적을 기다렸다.

北周軍은 步兵을 앞세우고 서쪽에서 몰려와 北齊의 진영 가까이 접근하였다. 北齊의 여러 장수들은 바로 맞아 공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段韶는 “보병의 기력이나 기세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지금은 白雪도 깊이 쌓였으므로 공격하기에는 좋은 조건이 아니다. 陣中에서 대기하라. 적은 피로하고 아군은 힘이 남아있으므로 적을 격파하기는 쉬운 일이다.”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北周軍이 보병을 선두로 하여 공격하자, 段韶는 騎馬를 이용하여 상대하면서 혹은 후퇴하고 혹은 유인하기를 거듭하다가, 적의 힘이 피폐하기를 기다려 마침내 일제히 말에서 내려 短兵接戰을 벌이니, 北周軍이 크게 궤멸되었다. ≪北齊書 권16 段韶列傳≫

孫子가 말하였다.

무릇 먼저 形勢의 지역에 있으면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면 병사와 말이 한가롭고 편안해서 힘이 넘친다. 예컨대 趙奢가 먼저 北山을 점거하여 秦나라 군대가 오기를 기다렸고, 段昭가 陣營을 결성하고서 突厥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 이것이다.


後處戰地而趨戰者는 勞라

싸울 곳에 뒤처져 있으면서 싸움터로 달려가는 자는 수고롭다.

後處便利之地하여 而趨走以戰者는 則士馬勞倦而力不足하나니 如馬謖(속)舍水上山하여 不下據城1)이 是也라

1) 馬謖(속)舍水上山 不下據城:馬謖(190〜228)은 삼국시대 蜀漢의 장수로, 建興 6년(228)에 蜀漢의 승상 諸葛亮이 魏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漢中을 나서 祁山으로 향할 적에, 선봉을 맡았으나 山上에 진을 쳤다가 식수원이 끊겨 패배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77쪽 주 2) 참조.

편리한 지역에 뒤처져 있으면서 달려가서 싸우는 자는 병사와 말이 수고롭고 지쳐서 힘이 부족하니, 예컨대 馬謖이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가서 아래로 城을 점거하지 않은 것이 이것이다.


故로 善戰者는 致人而不致於人이니라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자는 적이 오도록 만들고 적에게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故로 善戰者는 能致人之來하고 而我不致於人也라 致人則佚하고 致於人則勞하니 如耿弇(경감)多伐樹木하고 揚言塡塹하여 以攻巨里하여 致張步之來而破之1) 是也라

1) 耿弇(경감)多伐樹木……致張步之來而破之:耿弇(3〜58)은 後漢 光武帝의 名將이다. 光武帝가 耿弇에게 濟南의 張步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張步는 大將軍 費邑으로 하여금 歷下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다시 병력을 나누어 일부를 祝阿에 주둔시켰으며, 별도로 太山의 鍾城에도 수십 개의 陣營을 설치하여 耿弇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黃河를 건너간 耿弇은 먼저 祝阿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일부러 포위망 한쪽을 열어놓아 적으로 하여금 鍾城으로 도망하게 하였다. 鍾城 사람들은 祝阿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마침내 城을 비우고 도망하였다.

費邑은 아우 費敢을 보내어 巨里를 지키게 하였다. 耿弇은 진군하여 멀리 巨里를 위협하면서, 장병들에게 “巨里城을 공격하기 위해 樹木을 많이 베고 골짝의 구덩이를 메운다.”고 소문을 내게 하였다. 費邑은 이 소문을 듣고 巨里城을 구원하고자 하였다.

耿弇이 攻城器具를 수리하게 하고 “3일 후에 巨里城을 총공격한다.”는 명령을 선포하면서 포로를 은밀히 놓아주니, 포로가 돌아가 이 사실을 費邑에게 알렸다. 費邑은 서둘러 정예병력 3만여 명을 거느리고 巨里城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이에 耿弇은 3천 명의 병력을 나누어 巨里城을 포위하고, 자신은 정예병을 이끌고 높은 언덕으로 올라가 費邑의 군대와 맞아 싸워서 대파하여 費邑을 참수하고 濟南의 40여 진영을 평정하였다. ≪後漢書 권19 耿弇列傳≫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자는 적이 오도록 만들고 자신이 적에게 끌려가지 않는 것이다. 적을 오게 만들면 편안하고 적에게 끌려가면 수고로우니, 예컨대 耿弇이 나무를 많이 베어 골짜기를 메꾼다고 소문내고 巨里를 공격해서 張步가 오도록 만들어 격파한 것이 이것이다.


能使敵人自至者는 利之也요

능히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오게 하는 것은 이롭게 하기 때문이요,

能使敵人自至者는 以利誘之也니 如李牧佯北(배)하여 以致匈奴1)하고 楊素毁車하여 以誘突厥2)이 是也라

1) 李牧佯北(배) 以致匈奴:李牧이 거짓으로 패하여 匈奴를 오게 한 계략은 87쪽 주 1) 참조.

2) 楊素毁車 以誘突厥:楊素(544〜606)는 隋나라의 건국에 큰 공을 세워 越國公에 봉해지고 재상이 된 인물이다. 598년, 突厥의 達頭可汗이 변경을 침범하자, 楊素가 靈州道 行軍摠管으로 변경에 나가 이를 토벌하였는데, 諸將들은 오랑캐와 싸울 적에 騎兵이 돌진할 것을 염려하여 모두 戰車와 鹿角車로 方陣을 만들고 騎兵이 그 안에 있도록 하였다. 楊素는 말하기를 “이것은 견고히 지키는 방법이지 승리를 쟁취하는 방법은 아니다.”라고 하고, 諸軍에 명령하여 옛 陣法을 모두 버리고 騎兵陣을 구축하게 하였다.

이를 본 達頭可汗은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이다.”라고 기뻐하면서 정예기병 10여만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楊素가 힘을 다해 공격하여 이를 대파하니, 達頭可汗은 중상을 입고 달아났다. ≪隋書 권48 楊素列傳≫

적으로 하여금 스스로 오게 하는 것은 이익으로 유인하기 때문이니, 예컨대 李牧이 거짓으로 패하여 匈奴를 오게 하였고, 楊素가 수레를 부수어 突厥을 유인한 것이 이것이다.


能使敵人不得至者는 害之也니라

능히 적으로 하여금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적을 해치기 때문이다.

能使敵人必不得至者는 害其所顧愛也니 如孫臏救趙에 直走大梁而解邯鄲(한단)1)이 是也라

1) 孫臏救趙 直走大梁而解邯鄲(한단):大梁은 戰國時代 魏나라의 수도로서 지금의 河南省 開封市 서북쪽에 있으며, 邯鄲은 趙나라의 수도로서 지금의 河北省 남서부 太行山 동쪽 기슭에 있었다. 孫臏이 邯鄲의 포위를 풀게 한 것은 본서의 <孫子本傳> 참조.

적으로 하여금 반드시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들이 돌아보고 아끼는 것을 해치기 때문이니, 예컨대 孫臏이 趙나라를 구원할 적에 곧바로 大梁으로 달려가서 趙나라 도성인 邯鄲의 포위를 푼 것이 이것이다.


故로 敵佚이어든 能勞之하고

그러므로 적이 편안하거든 능히 수고롭게 하고,

故로 敵人이 本自暇佚이어든 我則設計而能使之勞也니 如隋伺陳收穫之際하여 聲言掩襲하고 待其聚兵하여 隨乃解甲하니 於是에 陳人病之1) 是也라

1) 隋伺陳收穫之際……陳人病之:北朝를 쟁패한 隋 文帝가 南朝의 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할 계책을 승상인 高熲(542〜607)에게 물으니, 高熲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 江北 지역은 기후가 추워서 가을 수확이 다소 늦고, 江南 지방은 기후가 따뜻해서 논의 벼가 일찍 익습니다. 저들이 수확하는 시기를 헤아려서 병사와 군마를 약간 모집하여 습격한다고 소문을 퍼뜨리면 저들은 반드시 병력을 주둔시키고 방어하느라 농사철을 놓칠 것입니다. 저들이 군대를 집결시키거든 우리는 군대를 해산시키기를 두세 차례 되풀이하면 저들은 이를 平常의 일로 여겨서 우리가 다시 군대를 집결시켜도 저들은 반드시 믿지 않을 것입니다.

저들이 출병을 머뭇거리는 사이에 우리가 군대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 상륙하여 싸우면 군대의 사기가 자연 배가될 것입니다. 또 江南 지방은 지층이 얇아 집집마다 띠풀과 대나무로 지붕을 만들었고 곡식을 쌓아둔 것이 모두 땅속의 굴이 아니니, 은밀히 行人들을 보내서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 태우고, 저들이 수리해 세우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불을 지르면, 수년이 지나지 않아 저절로 재력을 모두 소진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文帝가 그의 계책을 따른 결과, 陳나라는 더욱 피폐하게 되었다. ≪北史 권72 高熲列傳≫

그러므로 적이 본래 스스로 한가롭고 편안하면 우리가 계책을 써서 적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隋나라가 陳나라의 수확 시기를 살펴 습격한다고 소문내고는 陳나라가 병력을 모으기를 기다렸다가 곧바로 군대를 해산하기를 여러 차례 하니, 이에 陳나라 사람들이 피폐해진 것이 이것이다.


飽어든 能飢之하고

적이 배부르거든 능히 굶주리게 하고,

敵人이 本有糧餉而士卒充飽어든 我則設計而能使之飢也니 如周亞夫絶吳楚糧道1)하고 隋遣兵하여 焚燒陳人房屋積聚2)하고 李左車欲遮絶韓信輜重3)하고 白起張二奇兵하여 以劫趙括하여 使內陰相殺食者4) 是也라

1) 周亞夫絶吳楚糧道:周亞夫가 景帝 3년(B.C. 154)에 발발한 吳ㆍ楚 7國의 난을 평정할 적에 사용한 방법으로, 자세한 내용은 90쪽 주 2) 참조.

2) 隋遣兵 焚燒陳人房屋積聚:앞 단락의 ≪直解≫ 주 1) 참조.

3) 李左車欲遮絶韓信輜重:B.C. 205년, 漢나라의 將軍인 韓信이 張耳와 함께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趙나라를 공격할 적에, 廣武君 李左車가 趙王 歇과 成安君 陳餘에게 올린 계책으로 漢軍의 군량 보급로를 끊고 수비에 전념하자는 전략이다. 자세한 내용은 79쪽 주 1) 참조.

4) 白起張二奇兵……使內陰相殺食者:B.C. 260년, 白起가 秦나라의 大軍을 이끌고 長平에서 趙括의 40만 大軍과 대치하였는데, 白起는 奇兵(유격대) 두 부대를 매복해두고 趙軍을 공격하다가, 趙軍이 맞서 싸우자 거짓으로 패하여 달아났다. 趙軍은 승세를 타고 秦軍의 堡壘로 쳐들어갔으나, 秦軍이 굳게 항거하여 진입할 수가 없었다.

이때 秦나라의 奇兵 한 부대가 趙軍의 후미를 차단하고, 다시 한 부대가 趙軍의 堡壘 중간을 끊어 趙軍 진영을 두 개로 갈라놓고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였다. 秦王은 趙軍의 군량 수송로가 차단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직접 河內로 가서 전투에 참가한 백성들에게 각각 한 계급의 爵位를 내리고 15세 이상의 장정을 징발하여 모두 長平으로 달려가서 趙나라의 구원군과 식량 수송로를 끊게 하였다.

趙나라 병사들은 밥을 못 먹은 지 46일이 되자, 모두 은밀히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였다. 趙括은 할 수 없이 정예병을 내어 秦軍과 육박전을 벌였으나 결국 秦軍에게 사살되고, 趙나라의 40만 대군이 모두 항복하였다. ≪史記 권73 白起列傳≫

적이 본래 식량이 풍족하여 병사들이 배부르거든 우리가 계책을 써서 적으로 하여금 굶주리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周亞夫가 吳나라와 楚나라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였고, 隋나라가 병력을 보내어 陳나라의 방과 집과 쌓아놓은 곡식을 불태웠고, 李左車가 韓信의 輜重車를 차단하고자 하였고, 白起가 두 奇兵을 진열하여 趙括을 위협해서 적으로 하여금 안에서 은밀히 서로 잡아먹게 한 것이 이것이다.


安이어든 能動之니라

적이 편안하거든 움직이게 하여야 한다.

敵人이 本欲安守自固어든 我則設計而能使之動也니 如司馬宣王이 取遼東에 敵方阻水拒守어늘 宣王遂整陣하여 直指襄平하여 聲言搗其巢穴하니 賊見兵出하고 果來邀之어늘 因縱擊하여 大破其衆1)하고 臾騈(유병)堅壁이어늘 秦伯挑其裨將趙穿하니 趙盾(둔)이 遂命三軍하여 皆出與戰2)之類 是也라

1) 司馬宣王……大破其衆:司馬宣王은 三國時代 魏나라의 명장인 司馬懿(179〜251)인데, 손자 司馬炎이 晉王이 되어 宣王으로 추존되었고 司馬炎이 帝位에 올라 다시 宣帝로 추존되었으며, 襄平은 遼東의 公孫淵이 있던 본거지이다.

魏 明帝 景初 2년(238)에 公孫淵이 배반하자, 魏나라는 司馬懿로 하여금 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司馬懿가 병력을 이끌고 遼水로 진출하니, 公孫淵이 步兵과 騎兵 수만을 보내어 遼水의 통로를 막고 성벽을 굳게 지켜 저항하였다. 司馬懿는 적이 굳게 성을 지키고 있어 승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 빈 陣營을 만들어 적을 속이고 은밀히 遼水를 건너 강물을 곁에 끼고 길게 포위망을 구축한 다음, 諜者를 풀어 魏軍이 적을 버려두고 襄平으로 향한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리고 陣勢를 정돈하여 적군의 진영을 지나가니, 公孫淵은 이를 보고 魏軍이 참으로 襄平을 공격하는 것으로 오판하고 이를 막기 위해 수비 전술을 바꾸어 魏軍을 급히 요격하자, 司馬懿는 마침내 군대를 풀어 역공을 가해 대파하였는데,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승리하였다. ≪晉書 권1 高祖宣帝紀≫

2) 臾騈(유병)堅壁……皆出與戰:B.C. 615년에 秦나라와 晉나라가 會戰할 적에 晉나라가 臾騈의 계책을 따라 秦나라 군대를 지치게 하자, 秦나라가 晉나라 대부로 秦나라에 망명해 와 있던 士會의 계책을 써서 국면을 타개한 일이다. 자세한 내용은 118쪽 주 2) 참조.

적이 본래 편안히 지켜서 스스로 견고히 하려 하거든 우리가 계책을 써서 적으로 하여금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예컨대 司馬宣王이 遼東을 점령할 때에 적이 막 물가를 의지하여 막고 지키자, 宣王이 마침내 진영을 정돈하여 곧바로 襄平을 향해서 적의 소굴로 쳐들어간다고 소문내니, 적들이 宣王의 군대가 출동함을 보고 과연 와서 맞아 싸우므로 군대를 풀어 공격해서 그 무리를 대파하였으며, 晉나라의 臾騈이 성벽을 굳게 지키자 秦伯이 그의 裨將인 趙穿에게 도전하니, 趙盾이 마침내 三軍에게 명하여 모두 나와 함께 싸우게 한 따위가 이것이다.


出其所不趨하며 趨其所不意니라

적이 달려가지 않는 곳으로 출동하며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出敵人之所不趨하며 趨敵人之所不意하고 掩其空虛하여 攻其無備也니 如周文帝使將軍尉(울)遲逈伐蜀할새 逈以西蜀與中國隔絶이 百有餘年이라 恃其山川險阻하고 不虞我師之至라하여 選精甲銳騎하여 星夜襲之호되 平路則倍道兼行하고 險途則緩兵漸進하여 出其不意하여 衝其心腹하니 蜀人向風不守1) 是也라

1) 周文帝……蜀人向風不守:周 文帝는 西魏의 승상 宇文泰(507〜556)로, 뒤에 그의 아들 宇文覺이 帝位를 선양받아 北周를 창건하고 文帝로 추존하였으므로 이렇게 칭한 것이다.

梁 元帝가 江陵에 주둔하고 있을 적에 내란이 한창 심하므로 西魏와 우호를 맺을 것을 청하였다. 이때 元帝의 아우인 武陵王 蕭紀가 蜀에 있으면서 황제를 칭하고 출병하여 梁나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元帝는 크게 두려워하여 西魏에 편지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고, 蜀을 정벌해줄 것을 청하였다.

宇文泰는 “蜀을 도모할 수 있으니, 蜀을 점령하고 梁나라를 제압하는 것이 이 한 번의 출동에 달려있다.” 하고는, 尉遲逈에게 蜀의 정벌을 일임하면서 정벌 계획을 묻자, 그는 대답하기를 “蜀은 우리 중국과 단절된 지 백여 년이나 되어서 山川의 험함을 믿고 우리 군이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밤낮으로 달려가 습격하되, 평지에서는 속도를 배가하고 험한 길에서는 점진적으로 나아가 저들의 의표를 찔러 중심부를 공격하면 저들은 우리 군대의 신속한 출동에 놀라서 반드시 굳게 지키지 않고 도망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宇文泰는 尉遲逈 등으로 하여금 甲士 1만 2천 명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蜀을 정벌하게 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周書 권21 尉遲逈列傳≫

적이 출동하지 않는 곳으로 출동하며 적이 뜻하지 않은 곳으로 달려가서, 적의 空虛한 틈을 습격하고 적의 대비가 없는 곳을 공격하는 것이다.

예컨대 周 文帝가 장군 尉遲逈으로 하여금 蜀을 정벌하게 할 적에 尉遲逈은 “西蜀이 중국과 막혀있은 지가 백여 년이 되어서 산천의 험함을 믿고 우리 군대가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지 않는다.” 하고, 精銳한 병사와 騎兵을 선발하여 밤낮으로 달려가 습격하되 평탄한 길에서는 행군속도를 배가하고, 험한 길에서는 행군속도를 늦추어 점진적으로 나아가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출동해서 적의 심복을 찌르니, 蜀 땅 사람들이 바람을 향해 달아나고 지키지 못한 것이 이것이다.


行千里而不勞者는 行於無人之地也요

천 리를 행군하고도 수고롭지 않은 것은 사람이 없는 땅을 가기 때문이요,

行於空虛之處하여 雖千里之遠이라도 而兵無轉戰之勞者는 行於無人防守之地也니 如鄧艾(등애)伐蜀에 自陰平으로 行無人之地七百里1) 是也라

1) 鄧艾(등애)伐蜀……行無人之地七百里:景元 4년(263), 魏나라의 征西將軍 鄧艾가 蜀漢을 정벌할 적에 陰平에서 景穀의 길을 따라 사람이 없는 지역으로 700리를 은밀히 행군하여 江油에 이르러, 蜀漢의 守將 馬邈의 항복을 받고 綿竹關에서 蜀漢의 衛將軍 諸葛瞻을 격파하니, 蜀漢의 後主인 劉禪이 鄧艾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三國志 권28 鄧艾列傳≫

≪孫子髓≫에는 본문을 위의 ‘出其所不趨’, ‘趨其所不意’와 연관지어 “적의 허실을 살펴서 알면 적이 달려오지 않는 곳으로 출동하고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달려가 사람이 없는 땅을 가듯이 하여, 비록 천 리라도 수고롭지 않은 것이다. 이는 적이 예상하지 않은 지역을 말한 것이니, 하필 鄧艾가 털방석으로 몸을 싸서 陰平으로 진출한 것과 같게 할 필요가 있겠는가.[審敵虛實 則出敵所不趨 趨敵所不意 如行無人之地 雖千里而不勞 蓋謂敵所不虞之地 豈必如鄧艾之裹氈也]” 하였다.

空虛한 곳으로 행군하여 비록 천 리의 먼 길이라도 병사들이 전전하며 싸우는 수고로움이 없는 것은 적이 방비하고 지킴이 없는 땅을 가기 때문이다. 예컨대 鄧艾가 蜀漢을 정벌할 적에 陰平에서 사람이 없는 땅 700리를 행군한 것이 이것이다.


攻而必取者는 攻其所不守也요

공격하여 반드시 점령하는 것은 적이 지키지 않는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요,

攻而必取者는 攻敵人之所不守也니 如東漢耿弇이 令軍吏로 治攻具하여 約五日攻西安하니 西安聞之하고 日夜警守하고 臨淄를 不爲之備어늘 至期夜半하여 弇勒諸軍蓐(욕)食하고 趨臨淄하여 出其不意하여 一日拔之1)하고 漢末에 朱儁(준)이 擊黃巾賊帥韓忠할새 鳴鼓하여 攻其西南하니 賊衆悉赴之어늘 儁自將精卒五千하여 掩其東北하여 乘城而入하니 忠乃乞降2)이 是也라

1) 東漢耿弇……一日拔之:A.D. 29년, 光武帝가 耿弇으로 하여금 濟南의 張步를 토벌하게 하였다. 張步는 그의 아우 張藍에게 정예병 2만을 거느려 西安을 지키게 하고 1만여 명으로 臨淄를 지키게 하였는데, 西安과 臨淄 두 城의 거리는 40리가량 떨어져 있었다. 耿弇은 공성기구를 정비하게 하고 진군하여 西安과 臨淄의 한가운데를 갈라서 두 城 사이에 포진한 뒤, 여러 장교들에게 5일 후에 西安城을 공격한다는 명령을 선포하니, 張藍은 이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경계와 수비를 엄중히 하였다.

耿弇은 출격하기로 한 전날 한밤중에 諸將에게 명령을 내려 새벽 일찍 밥을 지어 먹고 동틀 녘에 臨淄城에 이르도록 하였다. 耿弇은 “西安에서는 우리가 공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수비를 강화하였으나 臨淄는 방심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 성을 공격하면 반드시 하루 만에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臨淄城이 함락되면 西安城은 고립되고 張藍과 張步는 연락이 끊겨 반드시 도망갈 것이니, 이른바 하나를 쳐서 둘을 얻는다는 것이다. 만약 먼저 西安을 공격하면 쉽사리 함락되지 않아서 반드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것이며, 함락시킨다 하더라도 張藍이 군대를 이끌고 臨淄로 달아나 합세하여 우리의 허실을 깊이 관망하면 우리는 적지에 깊이 들어와 군량을 수송할 길이 없어서 10여 일 사이에 싸우지도 않고 곤궁하게 될 것이다.” 하고, 臨淄城을 공격하여 반나절 만에 함락하니, 張藍이 이를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마침내 무리를 거느리고 도망하였다. ≪後漢書 권19 耿弇列傳≫

2) 朱儁(준)……忠乃乞降:朱儁은 後漢 말기에 大司農을 역임한 重臣으로 黃巾賊 토벌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184년, 朱儁이 潁川에 있는 韓忠을 토벌할 적에 급히 趙弘을 공격하여 참수하니, 韓忠이 다시 宛城을 점거하고 朱儁에게 항거하였다. 朱儁은 병력이 적었으므로 土山을 쌓아 宛城의 내부를 굽어보는 한편, 북을 치면서 성의 서남쪽을 공격하였다. 적들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이곳으로 몰려오자, 朱儁은 직접 정예병 5천을 거느리고 성의 동북쪽을 기습 공격하니, 韓忠이 마침내 후퇴하여 항복을 청하였다. ≪後漢書 권71 朱儁列傳≫

공격하여 반드시 점령하는 것은 적이 지키지 않는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東漢(後漢)의 耿弇이 병사와 관리들로 하여금 攻城 장비를 장만하게 하여 5일 뒤에 西安을 공격하기로 약속하니, 西安에서 이 소식을 듣고 밤낮으로 경계하여 지키고 臨淄는 수비하지 않았다. 耿弇은 공격한다는 날 한밤중이 되자, 병사들을 무장시켜 새벽밥을 먹이고 임치로 달려가서 적이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출동하여 하루 만에 임치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後漢 말기에 朱儁이 黃巾賊의 장수인 韓忠을 공격할 적에 북을 울리며 서남쪽을 공격하니, 적들이 모두 서남쪽으로 달려왔다. 朱儁은 직접 정예병 5천 명을 거느리고 동북쪽을 습격하여 城을 타고 쳐들어가니, 韓忠이 마침내 항복을 청한 것이 이것이다.


守而必固者는 守其所不攻也라

지키면 반드시 견고한 것은 적이 공격하지 않는 곳을 지키기 때문이다.

守而必固者는 守敵人之所不攻也니 如周亞夫平七國에 堅壁拒守하니 吳奔壁東南陬어늘 亞夫使備西北이러니 已而吳兵果奔西北하여 不得入하고 遂亂遁走1) 是也라

1) 周亞夫平七國……遂亂遁走:前漢의 周亞夫가 景帝 3년(B.C. 154)에 발발한 吳ㆍ楚 7國의 난을 평정할 적에 全面戰을 펼치지 않고 輕騎兵으로 反軍의 糧道를 차단하고 城을 굳게 지켰는데, 양식이 떨어져 궁지에 빠진 吳軍이 全力을 다해 城을 공격하였다. 周亞夫는 聲東擊西하려는 吳軍의 계략을 알고, 吳軍이 성벽 동남쪽으로 몰려오자 그 반대편인 서북쪽을 수비하게 하였다. 吳軍이 일거에 군대를 돌려 총력을 다해 성벽의 서북쪽을 공격하였으나, 미리 준비가 되어있던 토벌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고 혼란에 빠져 도망하였다. 周亞夫는 이 틈을 타 일거에 吳軍을 대파하고 반란을 평정하였다. ≪史記 권57 絳侯周勃世家≫

지키면 반드시 견고한 것은 적이 공격하지 않는 곳을 지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周亞夫가 吳․楚의 7國을 평정할 적에 성벽을 굳게 지키고 막으니, 吳나라 군대가 동남쪽의 성벽으로 달려오자, 周亞夫는 병사들로 하여금 서북 지방을 대비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吳나라 병사들이 과연 서북쪽으로 달려왔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마침내 혼란하여 도망한 것이 이것이다.


故로 善攻者는 敵不知其所守하고 善守者는 敵不知其所攻하나니

그러므로 공격을 잘하는 자는 적이 그 지킬 곳을 알지 못하고, 수비를 잘하는 자는 적이 그 공격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故로 善能攻者는 敵人不知其所守之處하고 善能守者는 敵人不知其所攻之處하나니 守者는 示敵以不足하고 攻者은 示敵以有餘하니 不足者는 虛也요 有餘者는 實也라 敵人이 旣不能知我虛實之情이라 是以로 攻而不知其所守하고 守而不知其所攻也라

그러므로 공격을 잘하는 자는 적이 그 지킬 곳을 알지 못하고, 수비를 잘하는 자는 적이 그 공격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수비하는 자는 적에게 부족함을 보여주고 공격하는 자는 적에게 有餘함을 보여주니, 부족함은 虛함이요 유여함은 實함이다. 적이 우리의 허실의 실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공격하면 그 지킬 곳을 알지 못하고 수비하면 그 공격할 곳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微乎微乎여 至於無形이요 神乎神乎여 至於無聲이라 故로 能爲敵之司命이니라

미묘하고 미묘하여 형체가 없음에 이르고, 신묘하고 신묘하여 소리가 없음에 이른다. 그러므로 능히 적의 司命이 되는 것이다.

微乎微乎者는 言其微之又微也요 神乎神乎者는 言其神之又神也라 攻守之術이 微妙神密하여 無形之可覩하고 無聲之可聞이라 故로 敵人死生之命이 皆司於我也라

미묘하고 미묘하다는 것은 미묘하고 또 미묘함을 말한 것이요, 신묘하고 신묘하다는 것은 신묘하고 또 신묘함을 말한 것이다. 공격하고 수비하는 방법이 신묘하고 비밀스러워서 볼 만한 형체가 없고 들을 만한 소리가 없다. 그러므로 적의 죽고 사는 목숨이 모두 나(우리)에게 달린 것이다.


進而不可禦者는 衝其虛也요 退而不可追者는 速而不可及也니라

진격하면 적이 막지 못하는 것은 적의 빈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요, 후퇴하면 적이 쫓아오지 못하는 것은 신속하여 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兵進而敵不可禦者는 衝擊敵人之虛也니 衝其虛면 敵豈能禦我哉리오 獲利而退에 而敵人不可以追我者는 由我兵行之速而不可及也니 退必速이면 敵豈能追我哉리오

군대를 진격하면 적이 막아내지 못하는 것은 적의 허술한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니, 허술한 곳을 공격하면 적이 어찌 우리를 막을 수 있겠는가. 이익을 얻고 후퇴할 때에 적이 우리를 추격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행군 속도가 빨라서 적이 미칠 수가 없기 때문이니, 후퇴하기를 반드시 신속히 하면 적이 어찌 우리를 추격할 수 있겠는가.


故로 我欲戰이면 敵雖高壘深溝라도 不得不與我戰者는 攻其所必救也요

그러므로 우리가 적과 싸우고자 하면 적이 비록 보루를 높이 쌓고 해자를 깊이 파더라도 우리와 싸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이는 적이 반드시 구원해야 할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故로 我欲與之戰이면 敵人이 雖高壘深溝而固守라도 不得不與我戰者는 攻其所顧愛而必救者也니 如司馬宣王이 討公孫文懿於遼東할새 文懿阻水拒守러니 宣王領兵하여 直走襄平하여 搗其巢穴하니 文懿出兵邀之한대 宣王三戰三捷1)하고 秦伐晉에 臾騈謂秦不能久라하여 請深壘固軍以待之어늘 士會請秦伯하여 襲擊趙穿하니 於是에 趙盾이 令三軍悉出與戰2)이 是也라

1) 司馬宣王……宣王三戰三捷:司馬宣王은 魏나라의 司馬懿(179〜251)이고, 公孫文懿는 遼東을 점거하고 있던 公孫淵이다. 魏 明帝 景初 2년(238)에 公孫淵이 배반하자, 司馬懿가 그를 토벌하였다. 자세한 과정과 전술은 171쪽 주 1) 참조.

2) 秦伐晉……令三軍悉出與戰: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文公 12년에 있었던 일로, 118쪽 주 2)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적과 싸우고자 하면 적이 비록 보루를 높이 쌓고 해자를 깊이 파고서 굳게 지키더라도 우리와 싸우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적이 돌아보고 아껴서 반드시 구원해야 할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司馬宣王이 公孫文懿를 遼東에서 토벌할 적에 公孫文懿가 물을 막고 지키자, 司馬宣王이 군대를 거느리고 곧바로 襄平으로 달려가서 적의 소굴로 쳐들어가니, 公孫文懿가 군대를 출동하여 맞이하므로 司馬宣王이 세 번 싸워 세 번 승리하였으며, 秦나라가 晉나라를 정벌할 적에 晉나라의 臾騈이 秦나라가 오랫동안 버티지 못할 것이라 하여 보루를 깊이 쌓고 군대를 굳게 지켜 기다릴 것을 청하였는데, 秦나라의 士會가 秦伯에게 청하여 趙穿을 습격하게 하니, 이에 趙盾이 三軍으로 하여금 모두 나와서 함께 싸우게 한 것이 이것이다.


我不欲戰이면 雖畫地而守之라도 敵不得與我戰者는 乖其所之也니라

우리가 싸우고자 하지 않으면 비록 땅을 긋고 지키더라도 적이 우리와 싸울 수 없는 것은, 적이 가는 곳을 어긋나게 하기 때문이다.

我不欲與彼戰이면 雖畫地而守之라도 敵人不得與我戰者는 設權變以乖戾其初往之心也라 如曹操爭漢中에 蜀先主拒之할새 時에 趙雲守別屯이러니 將數十騎輕出이라가 遇操軍하여 且戰且却하고 雲入營하여 使大開門하고 偃旗息鼓하니 曹公疑有伏引去1)하고 諸葛武侯屯陽平에 使魏延等으로 幷兵東下하고 惟留萬人守城이러니 司馬宣王이 來攻之한대 將士皆失色호되 亮意氣自若하여 勑軍中하여 臥旗息鼓하고 大開四門하고 掃地却洒하니 宣王疑有伏引去2) 是也라

1) 曹操爭漢中……曹公疑有伏引去:蜀漢의 先主는 劉備를 가리킨다. 219년, 曹操의 부하인 夏侯淵이 劉備에게 패하여 죽자, 曹操는 漢中 지방을 정벌하기 위해 北山 아래로 군량을 운반하였다. 이때 이들과 대치하고 있던 촉한의 黃忠이 적의 군량을 탈취하기 위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고 趙雲의 부대가 그 뒤를 엄호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黃忠이 약속한 시각 안에 돌아오지 못하자, 趙雲은 수십 명의 騎兵을 거느리고 급히 진군하여 적의 포위망을 뚫고 黃忠을 구출해 내었다. 曹操의 대군이 이를 추격하자, 趙雲은 張翼의 진영 안으로 들어갔다. 張翼은 陣門을 폐쇄하고 적을 막자고 하였으나, 趙雲은 陣門을 활짝 열어놓고는 깃발을 눕히고 북소리를 멈추니, 曹操는 趙雲이 복병을 배치했을 것으로 의심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趙雲은 북을 울리며 强力한 弓弩를 쏘아대니, 曹操 軍은 크게 놀라 저희끼리 짓밟히고 넘어져 漢水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三國志 권36 趙雲列傳≫

2) 諸葛武侯……宣王疑有伏引去:武侯는 諸葛亮의 시호이다. 227년, 諸葛亮이 陽平에 주둔해 있으면서 魏延 등 諸軍을 먼저 동쪽으로 내려보내고 오직 1만 명의 병력을 陽平에 남겨두어 城을 지키게 하였다. 魏나라의 司馬懿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諸葛亮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司馬懿가 전진하여 諸葛亮의 진영 60리 지점까지 쳐들어왔다. 魏나라의 정탐병이 諸葛亮의 城 안에 병력이 적다는 사실을 알렸으며, 諸葛亮 또한 司馬懿가 곧 쳐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전진하여 魏延 軍에게 가려 하였으나 거리가 멀어서 미칠 수가 없었다.

장병들은 대경실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諸葛亮은 태연자약하게 병사들에게 명하여 깃발을 모두 눕히고 북을 치지 말게 하고, 네 城門을 활짝 열어놓고 땅을 깨끗이 쓸어놓게 하였다. 司馬懿는 항상 諸葛亮을 신중한 인물이라고 여겼는데, 갑자기 이렇게 약한 형세를 보이자, 더 이상 전진하지 않고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다음날 아침밥을 먹을 때에 諸葛亮은 보좌관들과 박장대소하면서 말하기를 “司馬懿는 반드시 내가 거짓으로 약한 체하면서 강한 부대를 매복시켰을 것이라고 여겨 산을 따라 도망했을 것이다.” 하였다. 司馬懿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三國志 권35 諸葛亮列傳≫

우리가 적과 싸우고 싶지 않으면 비록 땅을 긋고 지키더라도 적이 우리와 싸울 수 없는 것은, 權變을 만들어 적들이 처음에 가려고 한 마음을 어긋나게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曹操가 漢中을 다투자 蜀漢의 先主(劉備)가 이들을 막았는데, 이때 다른 陣營을 지키던 趙雲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볍게 나왔다가 曹操의 군대를 만나자,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퇴각하였다. 趙雲은 진영으로 들어가서 軍門을 활짝 열고 깃발을 눕히고 북소리를 중단하니, 曹操는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그리고 諸葛武侯가 陽平에 주둔했을 적에 魏延 등으로 하여금 병력을 모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고 오직 1만의 병력만을 남겨두어 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司馬宣王(司馬懿)이 와서 공격하자 장병들이 모두 공포에 떨어 얼굴이 흑빛이 되었으나, 諸葛武侯는 마음과 기상이 태연하면서 군중에게 명하여 깃발을 눕히고 북소리를 멈추고, 四面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땅을 쓸어 청소하게 하니, 司馬宣王이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병력을 이끌고 돌아간 것이 이것이다.


故로 形人而我無形이면 則我專而敵分이니

그러므로 적에게 형체를 드러내어 보이되 우리가 실제로 형체가 없게 하면, 우리는 專一하고 적은 分散될 것이니,

故로 示奇正之形於人이로되 而我實無形하여 使敵窺之에 敵不能窺我之形이면 則我之力專하고 而敵之力分也라 謂吾之正을 使敵視爲奇하고 吾之奇를 使敵視爲正은 形人者也요 以奇爲正하고 以正爲奇하여 變化紛紜하여 使敵莫測은 無形者也라 敵形旣見에 我乃合衆以臨敵이면 我形不彰이라 彼必分勢以備我하리니 此는 我專而敵分之說也라

그러므로 奇․正의 형체를 적에게 보여주되 우리가 실제로 형체가 없게 해서, 적으로 하여금 엿보게 할 때에 적이 우리의 형세를 제대로 엿보지 못하게 하면, 우리의 힘이 전일해지고 적의 힘이 분산되는 것이다.

우리의 正兵을 적으로 하여금 奇兵으로 인식하게 하고, 우리의 奇兵을 적으로 하여금 正兵으로 인식하게 함은 적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요, 奇兵을 正兵으로 삼고 正兵을 奇兵으로 삼아서 어지럽게 변화해서 적으로 하여금 측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이다. 적의 형세가 이미 나타났을 때에 우리가 마침내 병력을 모아 적에게 임하면 우리의 형체가 드러나지 않으므로 저들이 반드시 세력을 나누어 우리를 대비할 것이니, 이것이 ‘우리는 전일하고 적은 분산된다.’는 이론이다.


我專爲一이요 敵分爲十이면 是는 以十攻其一也니 則我衆敵寡니라

우리는 전일하여 하나가 되고 적은 분산되어 열이 되면 이는 열을 가지고 하나를 공격하는 것이니, 우리는 많고 적은 적게 된다.

見敵之形이면 則我專而爲一이요 敵不能測我之形이면 則分而爲十以防我니 是는 我以十分之力으로 攻敵之一分也니 則我不得不衆이요 敵不得不寡라

우리가 적의 형체를 볼 수 있으면 우리는 전일하여 하나가 되고, 적이 우리의 형체를 헤아리지 못하면 분산되어 열이 되어서 우리를 방비할 것이니, 이는 우리가 10분의 힘을 가지고 적의 1분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병력이 많아지지 않을 수 없고, 적은 병력이 적어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能以衆擊寡면 則吾之所與戰者 約矣니라

많은 병력을 가지고 적은 적을 공격하면 우리가 상대하여 싸우는 자들이 적게 된다.

能以我十分之衆으로 擊敵人一分之寡면 則吾之所與戰者 用力少而成功多矣라

우리의 10분의 많은 병력을 가지고 적의 1분의 적은 수를 공격하면, 우리가 상대하여 싸우는 자들에게 힘을 조금만 쓰고도 많은 성공을 거두게 된다.


吾所與戰之地를 不可知니 不可知면 則敵所備者多요 敵所備者多면 則吾所與戰者寡矣니라

우리가 적과 싸우는 지역을 알 수 없게 하여야 하니, 알 수 없으면 적이 대비하는 곳이 많게 되고, 적이 대비하는 곳이 많게 되면 우리가 상대하여 싸우는 곳이 적게 된다.

吾所與戰之地를 使敵不可知者는 以其無形故也니 無形故로 不知我車果何出하고 騎果何來면 則敵分兵以備我者多요 敵旣分兵以備我者多면 則吾所與接戰者 寡矣니라

우리가 적과 싸우는 지역을 적으로 하여금 알 수 없게 하는 것은 그 형체가 없기 때문이니, 형체가 없으므로 우리의 戰車가 과연 어느 쪽으로 출동하고 騎兵이 과연 어느 쪽으로 출동할지를 적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적이 병력을 나누어 우리를 대비하는 곳이 많게 되고, 적이 이미 병력을 나누어 우리를 대비하는 곳이 많게 되면, 우리가 상대하여 접전하는 곳이 적게 되는 것이다.


故로 備前則後寡하고 備後則前寡하며 備左則右寡하고 備右則左寡요 無所不備면 則無所不寡니 寡者는 備人者也요 衆者는 使人備己者也라

그러므로 앞쪽을 대비하면 뒤쪽이 적어지고 뒤쪽을 대비하면 앞쪽이 적어지며, 왼쪽을 대비하면 오른쪽이 적어지고 오른쪽을 대비하면 왼쪽이 적어지며, 대비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 적어지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니, 병력이 적어지는 까닭은 상대방을 대비하기 때문이요, 병력이 많아지는 까닭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를 대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故로 防備其前이면 則在後之兵必少하고 防備其後면 則在前之兵必少하며 防備其左면 則在右之兵必少하고 防備其右면 則在左之兵必少하고 左右前後에 無處不備면 則無處不兵少也라 兵所以少者는 爲勢分而廣備於人也요 所以衆者는 爲勢專而使人備己也라

그러므로 그 앞쪽을 방비하면 뒤쪽에 있는 병력이 반드시 적어지고, 그 뒤쪽을 방비하면 앞쪽에 있는 병력이 반드시 적어지며, 그 왼쪽을 방비하면 오른쪽에 있는 병력이 반드시 적어지고 그 오른쪽을 방비하면 왼쪽에 있는 병력이 반드시 적어지며, 좌우 전후에 방비하지 않는 곳이 없으면 병력이 적어지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이다.

적의 병력이 적어지는 까닭은 세력을 나누어 상대방을 많이 대비하기 때문이요, 우리의 병력이 많아지는 까닭은 세력이 전일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우리를 대비하게 하기 때문이다.


故로 知戰之地하고 知戰之日이면 則可千里而會戰이니라

그러므로 전투할 지역을 알고 전투할 날짜를 알면 천 리 멀리에서도 적과 會戰할 수 있는 것이다,

故로 爲將者 知與敵會戰之地하고 又知其會戰之日이면 則可千里而與敵會戰이라 若孫臏知龐涓日暮至馬陵하고 馬陵道狹而傍多險阻하여 可伏兵이라하여 乃斫(작)大樹하여 白而書之曰 龐涓死此樹下라하고 令萬弩로 夾道而伏하고 期日暮에 見火擧而俱發이러니 涓果夜至하여 見白書하고 以火燭之하여 讀未畢에 萬弩齊發하니 涓乃自刎이라 齊因乘勝하여 大敗魏師하고 虜太子申1)이 是也라

1) 孫臏知龐涓日暮至馬陵……虜太子申:자세한 내용은 본서 <孫子本傳> 참조.

그러므로 장수 된 자가 적과 會戰할 지역을 미리 알고 또 회전할 날짜를 미리 알면 천 리의 먼 곳에서도 적과 회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孫臏은 龐涓이 저녁 늦게 馬陵에 도착할 줄을 알았다. 孫臏은 “馬陵은 길이 좁고 옆에 험한 곳이 많아서 병사를 매복할 만하다.” 하여, 마침내 큰 나무를 깎아서 희게 하고 여기에 쓰기를 “龐涓이 이 나무의 아래에서 죽을 것이다.” 하고, 1만 개의 쇠뇌를 가진 군대를 길 좌우에 매복시키면서 “날이 저물어 불이 들어 올려지는 것을 보면 일제히 발사하라.” 하였다. 龐涓이 과연 밤중에 이곳에 이르러 흰 나무에 쓰인 글씨를 보고 불을 밝혀서 다 읽기도 전에 1만 개의 쇠뇌가 일제히 발사되었다. 龐涓이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니, 齊나라는 인하여 승세를 타 魏軍을 대파하고 太子 申을 사로잡은 것이 이것이다.


不知戰地하고 不知戰日이면 則左不能救右하고 右不能救左하며 前不能救後하고 後不能救前이어든 而況遠者數十里요 近者數里乎아

전투할 지역을 알지 못하고 전투할 날짜를 알지 못하면, 왼쪽이 오른쪽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른쪽이 왼쪽을 구원하지 못하며, 앞쪽이 뒤쪽을 구원하지 못하고 뒤쪽이 앞쪽을 구원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먼 경우에는 수십 리이고 가까운 경우도 몇 리에 있어서이겠는가.

不知與敵會戰於何地하고 又不知會戰於何日하여 倉卒遇敵이면 則左不能救其右하고 右不能救其左하며 前不能救其後하고 後不能救其前이어든 而況遠者相去數十里요 近者相去數里乎아 如苻堅伐晉에 至淝水하여 遠不能救梁成於洛澗하고 近不能救苻融於陣前1)하며 劉昭烈伐吳에 連營七百里라가 陸遜以火攻之하여 拔四十餘營2)하니 此皆不知戰地하고 不知戰日하여 左右前後不能救援而敗者也라

1) 苻堅伐晉……近不能救苻融於陣前:東晉 太元 8년(383)에 前秦의 苻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東晉으로 진격하면서 먼저 苻融․張蠔․苻方 등을 보내어 潁口로 진출시키고 梁成․王顯 등은 洛澗에 주둔하게 하였다. 東晉의 謝玄은 劉牢之의 부대 5천 명을 선봉으로 내보냈다. 이에 劉牢之가 곧바로 洛澗으로 진격하여 梁成과 그 아우 梁雲을 격살하니, 前秦의 보병과 기병이 붕궤되었으나 苻堅은 이를 구원하지 못하고 대패하였으며, 苻融은 陣前에서 참살을 당하였다. ≪晉書 권79 謝玄列傳≫ 자세한 내용은 88쪽 주 1) 참조.

2) 劉昭烈伐吳……拔四十餘營:劉昭烈은 蜀漢의 황제 劉備를 이른다. 後漢 獻帝 建安 24년(219)에 荊州를 지키던 關羽가 吳나라에게 패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劉備는 帝位에 오르자, 關羽의 복수를 위해 蜀漢 章武 1년(221)에 대군을 이끌고 吳나라를 공격하였다. 吳나라에서는 陸遜을 장수로 삼아 이를 막게 하여 兩軍은 夷陵에서 대치하였다. 劉備는 700리에 걸쳐 50여 개의 陣營을 세우고 吳軍을 포위하였는데, 陸遜이 성벽을 굳게 지키고 도전에 응하지 않아 전선이 교착되었다.

이 무렵 蜀漢軍이 한여름의 무더위를 피하여 陣營을 숲 속으로 옮겼는데, 이를 알아차린 陸遜이 全軍을 동원해서 띠풀을 가지고 火攻을 하여 蜀漢의 진영을 공격하게 하니, 모든 진영들이 혼란에 빠져 각각 고립된 채, 차례로 무너져 대패하였다.

이보다 앞서 魏 文帝(曹丕)는 “劉備의 군대가 陸遜의 吳軍과 교전하는데 營寨를 구축하여 진영이 700여 리나 뻗쳤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劉備가 兵法에 밝지 못하구나. 어떻게 700리에 걸쳐 길게 陣營을 치고서 적과 겨룰 수 있단 말인가[ 이는 兵法에 꺼리는 바이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하였다. ≪三國志 권32 先主傳≫, ≪三國志 권2 文帝紀≫

적과 어느 지역에서 會戰할지를 알지 못하고 또 어느 날짜에 회전할지를 알지 못하면서 갑자기 적을 만나면, 왼쪽이 그 오른쪽을 구원하지 못하고 오른쪽이 그 왼쪽을 구원하지 못하며, 앞쪽이 그 뒤쪽을 구원하지 못하고 뒤쪽이 그 앞쪽을 구원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멀리 있는 자는 서로의 거리가 수십 리나 되고 가까운 자도 서로의 거리가 몇 리가 됨에 있어서이겠는가.

예컨대 苻堅이 晉나라를 정벌할 적에 淝水에 이르러 멀리는 洛澗에 있는 梁成을 구원하지 못하고 가까이는 陣 앞에 있는 苻融을 구원하지 못하였으며, 劉昭烈(劉備)이 吳나라를 정벌할 적에 700리의 진영을 연결하였다가 陸遜의 火攻으로 40여 개의 진영이 함락되었으니, 이는 모두 전투할 지역을 알지 못하고 전투할 날짜를 알지 못하여 왼쪽과 오른쪽, 앞쪽과 뒤쪽이 서로 구원하지 못해서 패한 경우이다.


以吾度(탁)之컨대 越人之兵이 雖多나 亦奚益於勝哉리오

나로서 헤아려보건대 越나라 사람의 병력이 비록 많으나 또한 어찌 승리에 유익함이 있겠는가.

以吾心忖度之컨대 越人之兵이 其數雖多나 亦何益於勝哉리오 張預曰 吾는 乃吳字之誤也니 言以吳之兵으로 度越之兵컨대 雖多나 無益於勝이라하니 亦通이라

나의 마음으로 헤아려보건대 越나라의 군대가 그 숫자가 비록 많으나 또한 어찌 승리에 유익함이 있겠는가.

張預는 말하기를 “‘吾’자는 바로 ‘吳’자의 잘못이니, 吳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越나라의 병력을 헤아려보건대, 越나라의 병력이 비록 많으나 승리에 유익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으니, 또한 통한다.


故로 曰勝可爲也라하니라

그러므로 ‘승리는 만들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吾故로 曰 兵之勝을 可爲也라 軍形篇曰 勝不可爲者는 以敵之有備者로 言也니 敵若有備故로 勝不可爲요 此曰勝可爲者는 以越必不能知戰之地, 知戰之日이니 取勝在我故로 可爲也라

내가 그러므로 ‘군대의 승리는 만들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앞의 <軍形>篇에 ‘승리는 만들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적이 대비가 있는 경우를 가지고 말한 것이니, 적이 만약 대비가 있으면 승리를 만들 수 없는 것이요, 여기서 ‘승리를 만들 수 있다.’고 말한 것은 越나라가 반드시 전투할 지역을 알지 못하고 전투할 날짜를 알지 못하니, 승리를 취함이 우리에게 달려있으므로 ‘승리를 만들 수 있다.’고 한 것이다.


敵雖衆이나 可使無鬪니라

적의 병력이 비록 많으나 우리와 싸우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敵兵雖衆이나 吾可使之無能與我鬪也니 謂分散其勢하여 不得齊力與我戰耳라

적의 병력이 비록 많으나 우리가 저들로 하여금 우리와 싸우지 못하게 할 수 있으니, 이는 그 형세를 분산시켜서 힘을 다스려 우리와 싸울 수 없게 함을 말한 것이다.


故로 策之而知得失之計하며

그러므로 계책하여 得失의 계산을 알 수 있으며,

故로 我籌策之면 則知敵人得失之計니 若西漢時에 黥布反이어늘 高祖召薛公問之한대 對曰 使布出上計면 山東은 非漢有也요 出中計면 勝敗를 未可知也요 出下計면 陛下高枕而臥하여 漢無事矣리이다 帝曰 何謂上計, 中計, 下計오 對曰 東取吳하고 西取楚하고 幷齊取魯하고 傳檄燕趙하고 固守其所면 此上計也요 東取吳하고 西取楚하고 幷韓取魏하고 據敖倉之粟하고 塞成皐之口면 此中計也요 東取吳하고 西取下蔡하고 歸重於越하고 身歸長沙면 此下計也니이다 帝曰 布計將安出고 對曰 布以驪(여)山之徒로 自致萬乘하니 此皆爲身이요 不顧其後라 必出下計1)라하니라 西魏遣于謹하여 討梁元帝於江陵할새 長孫儉問曰 蕭繹計將如何오 謹曰 耀兵漢沔하고 席卷渡江하여 直據丹陽이 是其上策이요 移郭內居民하여 退保子城하고 峻其陴堞하여 以待援至 是其中策이요 若難於移動하여 據守羅郭이면 是其下策이니라 儉曰 定出何策고 對曰 蕭氏保據江南하여 綿歷數紀하니 屬中原多故하여 未遑外略이요 且繹懦而無謀하여 多疑少斷하고 人難慮始하여 皆戀邑居하고 忌遷惡移하니 當保羅郭이라 必用下策2)이라하더니 後皆如其言하니라 古名將이 能策人之得失者 多矣라 姑記此二事하여 爲學者之法하노라

1) 黥布反……必出下計:薛公은 六國時代 楚나라의 執政大臣인 令尹으로 薛 땅을 맡아 薛公으로 불렸는데, 姓名은 전하지 않는다. 驪山之徒는 驪山에서 부역하던 죄인이란 뜻으로 黥布는 원래 성이 英인데 죄를 지어 黥刑을 받고 黥布로 불렸다. 驪山은 秦나라의 도성인 咸陽(지금의 西安)에 있는 산으로 이곳에 秦始皇帝의 陵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징발하여 부역을 시켰다. 黥布는 薛公의 예측대로 下策을 따랐다가 패망하였는바, 이 내용은 B.C. 195년에 있었던 일로, ≪史記≫ 권91 <黥布列傳>에 그대로 보인다.

2) 西魏遣于謹……必用下策:梁 元帝는 바로 蕭繹인바, 이 내용은 553년에 있었던 일로, ≪太平御覽≫ <兵部>에 그대로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가 계책을 세우면 적의 得失의 계산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西漢 때에 黥布가 배반하자, 高祖가 薛公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만일 黥布가 上策으로 나오면 山東 지방은 漢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이요, 中策(중간 계책)으로 나오면 승패를 알 수 없고, 下策으로 나오면 陛下께서 베개를 높이 베고 누우셔서 漢나라에 아무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高祖가 묻기를 “무엇을 上策, 中策, 下策이라 하는가[” 하니, 薛公은 대답하기를 “黥布가 동쪽으로 吳나라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楚나라를 점령하고 齊나라를 겸병하고 魯나라를 점령하고 燕나라와 趙나라에 격문을 돌리고 자기가 있는 곳을 굳게 지키면 이는 上策입니다. 동쪽으로 吳나라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楚나라를 점령하고 韓나라와 魏나라를 겸병하여 점령하고 敖倉의 곡식을 점거하고 成皐의 어구를 막으면 이는 中策입니다. 동쪽으로 吳나라를 점령하고 서쪽으로 下蔡를 점령하고 輜重車를 越나라로 돌려보내고 자신은 長沙로 돌아가면 이는 下策입니다.” 하였다.

高祖가 묻기를 “黥布의 계책이 장차 어디로 나오겠는가[” 하니, 薛公은 대답하기를 “黥布는 驪山에서 부역하던 무리로서 스스로 萬乘의 군주가 되었으니, 이는 모두 자신을 위하고 후손을 돌아보지 아니하여 반드시 下策으로 나올 것입니다.” 하였다.

西魏에서 于謹을 보내어 梁 元帝(蕭繹)를 江陵에서 토벌할 적에 長孫儉이 于謹에게 묻기를 “蕭繹의 계책이 장차 어떻게 나오겠는가[” 하니, 于謹이 대답하기를 “漢水와 沔水 지역에 병력을 과시하되 병력을 모두 인솔하여 揚子江을 건너가서 곧바로 丹陽을 점령하는 것이 上策이요, 城 안에 있는 거주민을 이주시키고 물러가 子城을 확보하고 城堞을 높이 쌓아 지원군이 이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中策이요, 만약 이동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羅郭(羅城)을 점거하여 지키면 이것이 下策입니다.” 하였다.

于儉이 묻기를 “정녕 무슨 계책으로 나오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蕭氏는 강남 지방을 점거하여 몇십 년을 면면히 이어왔는데, 지금 中原은 사변이 많아 밖을 경략할 겨를이 없으며, 또 蕭繹은 나약하고 智謀가 없어서 의심이 많고 결단력이 적으며, 사람들은 처음을 생각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서 모두 사는 고을을 연연해하고 옮겨가는 것을 싫어하니, 마땅히 羅郭을 保守하여 반드시 下策을 쓸 것입니다.” 하였는데, 뒤에 모두 그의 말과 같이 되었다.

옛날 名將들이 적의 득실을 잘 계책한 자가 많았었는데, 우선 이 두 가지 일을 기록하여 배우는 자의 법으로 삼는다.


作之而知動靜之理하며

적을 격동시켜서 적의 動靜의 이치를 알며,

杜牧云 激作敵人하여 使其應我然後에 觀其動靜理亂之形이니 如吳起云 令賤而勇者로 將輕銳以嘗敵호되 務於北하고 無務於得하며 觀敵之來하여 一坐一起에 其政以理하며 其追北에 佯爲不及하고 其見利에 佯爲不知면 此는 智將也니 愼勿與戰이요 若其衆讙譁하고 旌旗煩亂하여 其卒이 自行自止하고 其兵이 或縱或橫하며 其追北에 恐不及하고 見利에 恐不得이면 此爲愚將이니 雖衆可獲1)이 是也라 張預云 發作久之하여 觀其喜怒면 則動靜之理를 可得而知니 若晉文公拘宛春하여 以怒楚將子玉한대 子玉遂乘晉軍2)하니 是其動也요 諸葛亮이 遺婦人巾幗(귁)之飾하여 以怒司馬懿호되 懿終不出戰3)하니 是其靜也라

1) 吳起云……雖衆可獲:이 내용은 ≪吳子≫ <論將>에 그대로 보인다.

2) 晉文公拘宛春……子玉遂乘晉軍:이 내용은 90쪽 주 1) 참조.

3) 諸葛亮……懿終不出戰:이 내용은 138쪽 윗 단락 주 1) 참조.

杜牧이 말하기를 “적을 激動시켜서 우리에게 대응하게 한 뒤에 그 동정과 다스려지고 혼란한 형체를 보는 것이니, 예컨대 吳起가 말하기를 ‘천하고 용맹한 자로 하여금 정예병을 거느리고 적을 시험하되, 패함에 힘쓰고 얻음에 힘쓰지 말며, 적이 오는 것을 관찰하여 한 번 앉고 한 번 일어남에 그 정사(통제)가 다스려지며, 패배하는 우리를 추격할 적에 거짓으로 미치지 못하는 체하고 이익을 보았을 적에 거짓으로 알지 못하는 체하면, 이는 상대가 지혜로운 장수이니, 부디 상대하여 싸우지 말아야 하며, 만약 병사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깃발이 어지러워서 병사들이 제멋대로 가고 제멋대로 멈추며 병사들이 혹 縱으로 있고 혹 橫으로 있으며 패배하는 우리를 추격할 적에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고 이익을 봄에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면 이는 상대방이 어리석은 장수이니, 비록 병력이 많으나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張預는 이르기를 “發作(挑戰)하기를 오래하여 적장의 기뻐하고 노여워함을 보면 動靜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예컨대 晉 文公이 宛春을 구속하여 楚나라 장수 子玉을 성나게 하자 子玉이 마침내 晉나라 군대를 공격하였으니 이는 그 동함이요, 諸葛亮이 부인의 수건의 꾸밈을 보내어 司馬懿를 성나게 하였으나 司馬懿가 끝내 나와 싸우지 않았으니, 이는 그 고요한 것이다.” 하였다.

〇 愚按 作字는 不止激作敵人이요 凡有所施爲 皆作也라 故로 杜佑引此하여 爲侯之而知動靜之理라하니 謂遠斥侯而知敵人之動靜也라 張賁本에 爲詐之而知動靜之理라하니 謂或誑之以言하고 或誘之以利하고 或示之以害하여 多方以詭道欺之면 則敵之動靜을 可知라 夫兩國交爭에 務知彼之動靜이면 則我易爲之勝이니 若韓信欲破趙에 必先探知陳餘不用李左車之言然後에 敢出井陘(형)1)하니 若不知彼之動靜이면 不惟不可以取勝이요 又將自取其敗耳라 後篇에 相敵三十二法이 皆欲知敵之動靜也라

1) 韓信欲破趙……敢出井陘(형):79쪽 주 1) 참조.

〇 내가 살펴보건대 ‘作’자는 다만 적을 激作(격동)시킬 뿐이 아니요, 모든 시행하는 것이 다 作이다. 그러므로 杜佑가 이 글을 인용하여 “살펴서 動靜의 이치를 안다.” 하였으니, 이는 斥侯를 멀리 보내어서 적의 動靜을 앎을 말한 것이다.

張賁의 本에는 “적을 속여서 動靜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하였으니, 이는 혹 말로써 속이고 혹 이익으로써 유인하고 혹 해로움을 보여주어 여러 방면으로 속임수를 써서 적을 속이면 적의 動靜을 알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두 나라가 서로 다툴 적에 힘써서 적의 동정을 알아내면 우리가 승리하기가 쉽다. 예컨대 韓信이 趙나라를 격파하려 할 적에 반드시 먼저 陳餘가 李左車의 말을 따르지 않음을 탐지한 뒤에 감히 井陘으로 나갔으니, 만약 저들의 動靜을 알지 못한다면 비단 승리하지 못할 뿐만 아니요, 또 장차 스스로 그 패망함을 부를 것이다. 뒤편에 적을 살펴보는 32가지의 방법이 모두 적의 動靜을 알고자 한 것이다.


形之而知死生之地하며

형체를 보여주면 죽고 사는 땅을 알며,

以形示之면 則知敵所據之地死與生也라 謂形之以弱이면 則敵必進이요 形之以强이면 則敵必退니 如韓信破趙에 佯棄旗鼓하고 走水上軍하니 趙果空壁逐之나 水上軍이 皆殊死戰하여 不能敗라 趙軍欲歸壁이라가 見漢赤幟하고 遂亂遁走1)하니라 又如韓信以囊沙壅水하고 與龍且(저)戰이라가 佯敗走한대 龍且悉兵追之어늘 候其半渡하여 決壅囊하니 水大至하여 楚軍分爲二어늘 遂擊破之하고 斬龍且2)하니 此皆形之而知彼處於死地也라

1) 韓信破趙……遂亂遁走:79쪽 주 1) 참조.

2) 韓信以囊沙壅水……斬龍且:82쪽 주 4) 참조.

형체를 보여주면 적이 점거한 땅이 죽을 땅인지 살 땅인지를 아는 것이다. 약함을 보여주면 적이 반드시 진격하고 강함을 보여주면 적이 반드시 후퇴함을 말한 것이니, 예컨대 韓信이 趙나라를 격파할 적에 거짓으로 大將의 깃발과 북을 버리고 水上軍으로 달려가자, 趙나라 군대가 과연 성벽을 비우고 추격하였으나, 水上軍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워서 패퇴시킬 수가 없었다. 趙나라 병사들이 성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漢나라의 붉은 깃발이 꽂혀있는 것을 보고는 마침내 혼란하여 도망하였다.

또 韓信이 주머니에 모래를 담아 물을 막아놓고 楚나라의 龍且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주하자 龍且가 병력을 총동원하여 추격하였다. 韓信은 龍且의 군대가 절반쯤 건넜을 때를 헤아려서 막아놓았던 모래주머니를 터놓으니, 물이 크게 몰려와서 楚나라 군대가 둘로 나누어지므로, 마침내 楚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龍且를 목 베었다. 이는 모두 형체를 보여주어 저들이 죽을 곳에 처함을 안 것이다.


角之而知有餘不足之處니라

적과 다투게 하면 적의 有餘하고 不足한 곳을 아는 것이다.

以銳兵으로 左右角觸之면 則知敵人有餘不足之處1)니 春秋左傳曰 左右角之2)라하니 謂張兩角하여 從傍攻之也라 如蕭王以兵三千으로 親犯尋邑中軍3)하니 知敵之有餘也요 謝玄遣劉牢之하여 領兵五千하여 趣洛澗하여 斬梁成4)하니 知敵之不足也라 愚謂 策之作之形之角之四者는 出自我者也요 得失動靜死生有餘不足八者는 應於彼者也라 策與作은 用謀요 形與角은 用兵이라 大抵此篇이 只說虛實하니 得也動也生也有餘也는 敵之實也니 實則備之하고 失也靜也死也不足也는 敵之虛也니 虛則擊之라 舊注에 訓將爲解激하고 訓作爲激作하고 訓角爲角量하니 與儒家不同이라 未知何所出也로라

1) 以銳兵……則知敵人有餘不足之處:≪孫子髓≫에는 “角은 힘으로 겨루는 것이고 有餘와 不足은 견고함과 하자(견고하지 못함)이다.[角 角力也 有餘不足 堅瑕也]” 하였다.

2) 春秋左傳曰 左右角之:左右角之는 좌우 측면에서 공격하는 것으로, 이 내용은 ≪春秋左氏傳≫ 宣公 12년에 보인다.

3) 蕭王 以兵三千 親犯尋邑中軍:蕭王은 당시 光武帝의 封號이며, 王尋과 王邑은 王莽의 장수이다. 王莽이 漢나라를 찬탈하고 황제가 되자, 사방에서 義兵이 일어났다. 光武帝가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王莽을 공격하니, 王莽은 王尋과 王邑으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였으나 대패하고, 王莽은 결국 光武帝의 군대에게 피살되었다. ≪後漢書 권1 光武帝紀≫

4) 謝玄遣劉牢之……斬梁成:梁成은 前秦의 장수이고, 劉牢之는 東晉의 장수이다. 五胡十六國 때에 前秦의 苻堅이 梁成 등을 거느리고 東晉을 공격하였다가, 東晉의 謝玄과 劉牢之에게 패한 일을 이르며, 자세한 내용은 88쪽 주 1)과 183쪽 아래 단락 주 1) 참조.

精銳兵을 가지고 좌우로 저촉하면 적의 有餘하고 不足한 곳을 아는 것이다. ≪春秋左氏傳≫에 이르기를 “左右에서 다툰다.” 하였으니, 두 角을 벌려서 옆에서 공격함을 말한 것이다. 예컨대 蕭王(光武帝)이 3천 명의 병력을 가지고 직접 王尋과 王邑의 중군을 범하였으니 이는 적이 有餘함을 안 것이요, 謝玄이 劉牢之를 보내어 5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洛澗으로 달려가서 梁成을 목 베게 하였으니 이는 적이 不足함을 안 것이다.

내가 생각하건대 적을 계책(계산)하고 적을 격동시키고 적을 나타나게 하고 적과 다투게 하는 네 가지는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요, 得과 失, 動과 靜, 死와 生, 有餘와 不足 이 여덟 가지는 적에게 대응하는 것이다. 策과 作은 계책을 쓰는 것이고, 形과 角은 用兵하는 것이다.

대체로 이 篇에서는 오직 虛實만을 말하였으니, 得․動․生․有餘는 적이 實한 것이니 實하면 대비하고, 失․靜․死․不足은 적이 虛한 것이니 虛하면 공격하는 것이다.

舊注에는 將을 解激이라 訓하고, 作을 激作이라 訓하고, 角을 角量이라 訓하여 儒家의 말과 똑같지 않으니,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故로 形兵之極은 至於無形이니 無形이면 則深間不能窺하고 智者不能謀니라

그러므로 병력을 나타냄이 지극함은 형체가 없음에 이르는 것이니, 형체가 없으면 깊이 숨어든 간첩도 엿보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도 도모하지 못한다.

故로 以兵之虛實로 形敵하여 到得極致之處하여 無形之可測也라 旣無形可測이면 則雖深於間者라도 不能窺其隙하고 智者라도 不能運其謀矣라

이 때문에 병력의 虛實을 가지고 적에게 보여줌이 극치의 경지에 이르면, 측량할 만한 형체가 없는 것이다. 이미 측량할 만한 형체가 없으면, 비록 간첩으로 깊이 숨어든 자라도 그 틈을 엿보지 못하고 지혜로운 자라도 그 계책을 운용하지 못한다.


因形而措勝於衆호되 衆不能知하고

형체를 인하여 사람들에게서 승리를 취하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因敵變動之形하여 而措勝於衆人호되 衆人所不能知也라

적의 變動하는 형체를 인하여 사람들에게서 승리를 취하되 사람들이 알지 못한다.


人皆知我所以勝之形하고 而莫知吾所以制勝之形이니라

사람들은 모두 내가 승리하는 형체만 알고, 내가 승리하게 만드는 형체는 알지 못한다.

人皆知我所以搴旗斬將勝敵之形이요 而莫知吾所以因敵制勝之形也라

사람들은 모두 내가 적의 깃발을 뽑아오고 적장을 목 베고 적을 이기는 형체만 알고, 내가 적의 형편을 따라 승리하게 만드는 형체는 알지 못한다.


故로 其戰勝不復(부)요 而應形於無窮이니라

그러므로 싸워 승리한 계책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고, 형체에 대응하기를 무궁무진하게 하는 것이다.

故로 其戰勝之謀를 不復更用1)이요 而隨敵之形하여 出奇應之하여 而至於無窮也라

1) 其戰勝之謀 不復更用:復를 대부분의 註釋에는 ‘다시’로 보았으나, ≪孫子髓≫에는 “不復(복)을 여러 주석가들이 ‘모두 전에 사용한 계책을 인습하지 않은 것이다.[謀不襲前]’라고 하였으니, 또한 통하나 글 뜻이 자못 짧다.”라고 비판하고, 復을 ‘회복하다’, ‘돌아가다’로 보아 “復은 그것을 후회하는 말이니, 잘못이 없다면 어찌 후회하겠는가.[復 悔之之辭 無失何悔]”라고 하여, 본문의 ‘戰勝不復’을 ‘싸우면 승리하여 후회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싸워서 승리한 계책을 두 번 다시 사용하지 않고, 적의 형체에 따라 기이한 계책을 내어 대응해서 무궁무진함에 이르는 것이다.


夫兵形은 象水니 水之形은 避高而趨下하고 兵之形은 避實而擊虛하나니

군대의 형체는 물을 형상하니, 물의 형체는 높은 곳을 피하고 낮은 곳으로 달려가고, 군대의 형체는 적의 實한 곳을 피하고 虛한 곳을 공격한다.

夫兵之形은 象水之形하니 水之形은 避地之高而趨地之下하고 兵之形은 避敵之實而擊敵之虛하나니라

군대의 형체는 물의 형체와 비슷하니, 물의 형체는 땅의 높은 곳을 피하고 땅의 낮은 곳으로 달려가며, 군대의 형체는 적의 實한 곳을 피하고 적의 虛한 곳을 공격하는 것이다.


水因地而制流하고 兵因敵而制勝이니라

물은 땅에 따라 흐르고 군대는 적에 따라 승리하는 것이다.

水之方圓斜直은 因地而制流也요 兵之虛實强弱은 隨敵而取勝也라

물의 네모지고 둥글고 기울고 곧음은 지형에 따라 흐르고, 군대의 虛와 實, 强과 弱은 적에 따라 승리하는 것이다.


故로 兵無常勢하고 水無常形하니

그러므로 군대는 일정한 형세가 없고 물은 일정한 형체가 없는 것이니,

故로 兵無一定之勢하여 因敵之虛實而變하고 水無一定之形하여 因地之高下而變이라

그러므로 군대는 일정한 형세가 없어서 적의 虛하고 實함을 따라 변하고, 물은 일정한 형체가 없어서 땅의 높고 낮음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能因敵變化而取勝1)者를 謂之神이라

1) 能因敵變化而取勝:≪孫子髓≫에는 “朱鹿岡의 說을 따라 ‘而’자를 앞으로 당겨 ‘因敵而變化取勝’으로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렇게 할 경우 漢文 文法上 더욱 맞는다고 생각된다.

적에 따라 변화하여 승리하는 것을 神妙하다 이른다.

能因敵之虛實變化와 我之奇正하여 而取勝於彼者를 謂之神妙莫測也라

능히 적의 虛․實의 변화와 나의 奇․正에 따라 적들에게서 승리를 취하는 것을, 神妙하여 측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故로 五行은 無常勝하고 四時는 無常位하며 日有短長하고 月有死生이니라

그러므로 五行은 항상 이기는 것이 없고 四時는 일정한 자리가 없으며, 해는 짧고 긺이 있고 달은 죽고 삶이 있는 것이다.

故로 木火土金水五行이 無恒久之勝하니 謂木勝則土衰하고 火勝則金衰하고 土勝則水衰하고 金勝則木衰하고 水勝則火衰1)하나니 豈有一定之勝哉아 春夏秋冬四時 無恒久之位하니 謂春而夏하고 夏而秋하고 秋而冬하고 冬又復爲春하나니 豈有一定之位哉아 日北至則長하고 日南至則短하며 月晦而魄死하고 月朔而魄生2)하나니 四者는 皆喩兵勢之無定也라

1) 木勝則土衰……水勝則火衰:五行의 相剋을 가지고 말한 것으로, 木은 土를 이기고 火는 金을 이기며, 土는 水를 이기고 金은 木을 이기며, 水는 다시 火를 이기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2) 日北至則長……月朔而魄生:해는 동쪽에서 뜨지만, 봄과 여름에 해가 동북쪽에서 떠오르면 해가 길어지고, 가을과 겨울에 동남쪽에서 떠오르면 해가 짧아진다. 魄은 달빛으로, 달빛은 음력 초하루부터 생기기 시작하여 보름이면 가득차고, 열엿새부터 줄어들기 시작하여 그믐이면 완전히 사라지므로 ‘달이 그믐이 되면 魄이 죽고, 달이 초하루가 되면 魄이 산다.’고 한 것이다. ≪禮記≫ <鄕飮酒義>에 “달은 3일에 魄을 이루고, 3월에 한철을 이룬다.”라고 보인다.

그러므로 나무[木]와 불[火]과 흙[土]과 금[金]과 물[水]의 五行이 항상 오랫동안 이김이 없으니, 나무가 이기면 흙이 쇠하고 불이 이기면 금이 쇠하고 흙이 이기면 물이 쇠하고 금이 이기면 나무가 쇠하고 물이 이기면 불이 쇠함을 이르니, 어찌 일정한 이김이 있겠는가.

봄과 여름, 가을과 겨울의 四時가 항상 오래하는 자리가 없으니, 봄이 되었다가 여름이 되고 여름이 되었다가 가을이 되고 가을이 되었다가 겨울이 되고 겨울이 되었다가 또다시 봄이 됨을 말한 것이니, 어찌 일정한 자리가 있겠는가.

해가 북쪽 끝까지 가면 길어지고 해가 남쪽 끝까지 가면 짧아지며, 달이 그믐이 되면 魄(月光)이 죽고 달이 초하루가 되면 魄이 살아나니, 이 네 가지는 모두 군대의 형체가 일정함이 없음을 비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