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謀攻 第三

제3편 공격의 圖謀


謀攻者는 謀取人之國하고 謀伐人之兵也라 上篇에 言作戰은 欲拙速而取勝이요 不欲巧久而鈍兵挫銳러니 此篇에 言謀攻은 欲全爭於天下요 不欲破人之國, 毁人之城하니 古人不得已用兵之意를 於此에 亦可見矣니라

謀攻이란 남(적)의 나라를 점령할 것을 도모하고 남의 군대를 정벌할 것을 도모하는 것이다. 上篇에 말한 ‘作戰’은 拙速하게 하여 승리를 쟁취하고자 하였고, 교묘하게 잘하고자 하여 지구전을 펴다가 兵器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병사들의 銳氣를 꺾어서는 안 됨을 말하였는데, 이 篇에서 말한 ‘謀攻’은 온전함을 天下에 다투고자 하고, 남의 나라를 격파하고 남의 城을 허물고자 하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옛사람이 부득이하여 用兵한 뜻을 여기에서 또한 볼 수 있다.


孫子曰 凡用兵之法은 全國爲上이요 破國次之며

孫子가 말하였다.

무릇 用兵하는 법은 敵의 나라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敵의 나라를 격파하는 것이 그다음이 되며,

孫子言 凡用兵之法은 全人之國이 爲上이요 破人之國이 次之니 如文王伐崇에 因壘而降1)하고 及宋曹彬取南唐2)과 元伯顔取南宋3)은 皆能全人之國이요 劉裕取南燕4)하고 曹翰取江州5)에 誅殺太甚하니 此는 不能全人之國者也라

1) 文王伐崇 因壘而降:崇은 國名으로 崇侯 虎는 周 文王을 殷나라 紂王에게 참소하여 갇히게 한 자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19년에 “宋나라 사람이 曹나라를 포위하였으니, 복종하지 않는다 하여 토벌한 것이었다. 宋나라의 子魚가 宋公에게 아뢰기를 ‘옛날 文王은 崇나라가 혼란하다는 말을 듣고 정벌하였는데, 30일이 지나도 항복하지 않자 물러가 文敎를 닦고 다시 정벌하여 예전의 보루를 증축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해서 항복받았습니다.’[文公聞崇德亂而伐之 軍三旬而不降 退修敎而復伐之 因壘而降] 했다.”라고 보인다.

2) 宋曹彬取南唐:曹彬은 北宋 초기의 名將이며, 南唐의 군주는 李煜이다. 975년, 曹彬은 南唐을 토벌하면서 일절 軍民을 살육하지 않고 李煜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宋史 권258 曹彬列傳≫

3) 元伯顔取南宋:伯顔(1236〜1295)은 元나라 초기의 군략가이며 정치가이다. 1274년 元나라에서 대거 군대를 일으켜 南宋을 정벌할 적에, 병으로 사퇴한 史天澤 대신 大將軍이 되어 宋軍을 격파하고 南宋의 수도 臨安으로 진입하여, 南宋의 恭帝와 謝太后 및 여러 宗室과 大臣을 포로로 붙잡고 南宋을 멸망시켰다. ≪元史 권127 伯顔列傳≫

4) 劉裕取南燕:劉裕(363〜422, 재위 420〜422)는 東晉의 武將으로, 제위를 찬탈한 桓玄을 제거하고 東晉의 국정을 전단하다가 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南朝의 宋나라를 건국한 인물이다. 東晉 安帝 義熙 6년(410)에 劉裕가 대군을 내어 南燕을 정벌하였는데, 南燕이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고 농성한 것을 괘씸하게 여겨 王公 이하 3천여 명을 참수하고 재산을 적몰하였으며, 城과 垓子를 허물고 南燕의 황제 慕容超를 建康으로 보내 참수하게 하였다. ≪資治通鑑 권113 晉紀 安皇帝≫

5) 曹翰取江州:曹翰(924〜992)은 北宋 太祖 때의 장군으로, 開寶 9년(976)에 군대를 이끌고 江州를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키고 온 城을 屠戮하여 수많은 백성을 죽였다. ≪宋史 권3 太祖本紀≫

孫子가 말하였다.

무릇 用兵하는 법은 ‘남(적)의 나라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남의 나라를 격파하는 것이 그다음이 된다.’ 하였으니, 예컨대 周 文王이 崇나라를 정벌할 적에 堡壘를 그대로 이용하여 항복받았으며, 宋나라 曹彬이 南唐을 점령한 것과 元나라 伯顔이 南宋을 점령한 것은 모두 남의 나라를 온전하게 한 것이며, 劉裕가 南燕을 점령하고 曹翰이 江州를 점령할 적에 사람 죽이기를 너무 많이 하였으니, 이는 남의 나라를 온전하게 하지 못한 것이다.


全軍爲上이요 破軍次之며

적의 軍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적의 軍을 격파하는 것이 그 다음이 되며,

全人之軍이 爲上이요 破人之軍이 次之라 萬二千五百人이 爲一軍이니 古者에 天子는 六軍이요 大國은 三軍이요 次國은 二軍이요 小國은 一軍이라 如光武收銅馬, 鐵脛(경), 尤來, 大鎗, 及赤眉1)之類는 皆能全人之軍이요 白起詐坑趙卒2)하고 項羽詐坑秦卒3)은 皆不能全人之軍也라

1) 光武收銅馬……及赤眉:銅馬․鐵脛․尤來․大鎗․赤眉는 모두 前漢 말기 王莽이 정권을 잡은 혼란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군의 무리이다. 이들은 군단을 형성하여 각자 將軍 등의 칭호를 일컬었으며, 자신들이 점거하고 있는 산천이나 지명에 따라 이름하였는데, 赤眉는 눈썹을 붉게 칠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光武帝는 항복해 온 이들을 포용하고 융화시켜 後漢을 일으켰는데, 특히 銅馬의 협력에 큰 힘을 입었으므로, 光武帝를 銅馬帝라 일컫기도 하였다. ≪後漢書 권1 光武帝紀 上≫

2) 白起詐坑趙卒:白起([〜B.C. 257)는 戰國時代 秦나라의 名將으로 長平에서 趙括이 이끄는 趙나라의 大軍을 대파하였는데, 이때 항복한 趙軍 40여만 명을 속여서 묻어 죽였다. ≪史記 권73 白起列傳≫

3) 項羽詐坑秦卒:項羽(B.C. 232∼B.C. 202)는 秦나라 말기의 武將으로 楚나라의 大將軍이 되어 秦나라의 장군인 章邯과 司馬欣, 董翳와 싸워 승리하고, 그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데리고 온 병사들이 불공평한 대우에 불만을 터뜨리자, 新安城 남쪽에서 20여만 명을 속임수를 써서 묻어 죽였다. ≪史記 권7 項羽本紀≫

적의 軍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적의 軍을 격파하는 것이 그다음이 된다. 1만 2,500명을 1軍이라 하니, 옛날 天子는 6軍이고 大國은 3軍이고 그다음의 나라는 2軍이고 작은 나라는 1軍이다.

예컨대 光武帝가 銅馬, 鐵脛, 尤來, 大鎗, 赤眉 등을 점령한 따위는 모두 남의 軍을 온전하게 한 것이고, 白起가 속임수로 趙나라의 병사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이고, 項羽가 속임수로 秦나라의 병사들을 구덩이에 묻어 죽인 것은 모두 남의 軍을 온전하게 하지 못한 것이다.


全旅爲上이요 破旅次之며

敵의 旅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적의 旅를 격파하는 것이 그다음이 되며,

全人之旅 爲上이요 破人之旅 次之라 五百人爲一旅라

남의 旅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남의 旅를 격파하는 것이 그다음이 된다. 500명을 1旅라 한다.


全卒爲上이요 破卒次之며

敵의 卒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적의 卒을 격파하는 것이 그다음이 되며,

全人之卒이 爲上이요 破人之卒이 次之라 百人爲一卒이라

남의 卒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남의 卒을 격파하는 것이 그다음이 된다. 100명을 1卒이라 한다.


全伍爲上이요 破伍次之라

적의 伍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적의 伍를 격파하는 것이 그다음이 된다.

全人之伍 爲上이요 破人之伍 次之라 五人爲一伍라

남의 伍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 上이 되고, 남의 伍를 격파하는 것이 그다음이 된다. 5명을 1伍라 한다.


是故로 百戰百勝은 非善之善者也요

이 때문에 백 번 싸워서 백 번 승리하는 것은 잘하는 중에 또 잘하는 자가 아니요,

以此之故로 與人百戰而百勝은 非所謂善之又善者也라 言數(삭)戰而勝이면 必致殺人之多하니 如秦白起之類 是也라

이 때문에 남과 백 번 싸워서 백 번 승리하는 것은 이른바 ‘잘하는 중에 또 잘하는 자’가 아니다. 여러 번 싸워 승리하면 반드시 사람을 많이 죽이게 되니, 秦나라 白起와 같은 따위가 이것이다.


不戰而屈人之兵이 善之善者也라

싸우지 않고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것이 잘하는 중에 또 잘하는 자인 것이다.

不與人戰而服人之兵은 善之又善者也니 如舜舞干羽而有苗格1)이 是也라

1) 舜舞干羽而有苗格:三苗가 배반하자 舜임금이 禹王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는데, 공격한 지 30일이 되도록 승리를 거두지 못하였다. 伯益이 禹임금에게 武力을 앞세우지 말고 文德을 베풀 것을 청하자, 禹王이 그의 말을 받아들여 회군하였다. 舜임금이 文德을 크게 펴서 방패와 깃으로 뜰에서 춤을 추었는데, 70일 만에 三苗가 항복해 왔다. ≪書經 虞書 大禹謨≫

有苗는 바로 三苗이다. 옛날 춤을 출 적에 방패와 창을 잡고 춤추는 것을 武舞라 하고, 깃으로 만든 부채나 日傘을 잡고 춤추는 것을 文舞라 하였다.

남과 싸우지 않고 남의 군대를 굴복시키는 것은 잘하는 중에 또 잘하는 자이다. 예컨대 舜임금이 방패와 깃털을 가지고 춤을 추자 有苗가 와서 항복한 것이 이것이다.


故로 上兵은 伐謀요

그러므로 최고의 군대는 적의 계략을 정벌하는(깨뜨리는) 것이요,

故로 上兵은 伐人之謀하니 言破其謀而降其軍이요 不必與之戰也라 伐謀之事 不止於一이라 或敵人將謀伐我어든 我先伐其謀라 故로 敵人不得伐我하나니 如晏嬰破范昭之謀拒我1)라 我乃伐其謀하여 使敵人不得與我戰이니 如春秋時에 秦晉相拒할새 晉臾騈(유병)爲趙盾(둔)謀하여 深壘固軍하고 不與秦戰한대 秦士會謀襲趙穿이어늘 趙盾이 乃皆出戰交綏2) 是也라

1) 晏嬰破范昭之謀拒我:晏嬰([〜B.C. 500)은 春秋時代 齊나라의 名相이고, 范昭는 晉나라의 大夫이다. 晉 平公이 齊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范昭를 사신으로 보냈다. 齊 景公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때 范昭가 景公에게 청하여 경공의 술잔을 받아 마시니, 晏嬰이 바로 술잔을 치우고 다른 술잔을 가져오게 하였다. 范昭가 晉나라에 돌아가서 平公에게 아뢰기를 “지금은 齊나라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 군주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더니, 晏嬰이 이를 알아차렸습니다.”라고 하였다. 孔子가 이 말을 듣고 “술동이와 도마를 벗어나지 않고도 천 리 밖의 적을 꺾었다.” 하고 晏嬰을 칭찬하였다. ≪晏子春秋 권5≫

2) 秦晉相拒……乃皆出戰交綏:B.C. 615년, 秦伯이 晉나라를 공격하자, 晉나라 장수 趙盾이 이를 방어하였다. 晉나라 上軍의 補佐인 臾騈이 건의하기를 “秦나라는 지구전을 하지 못할 것이니, 城을 높이 쌓고 堡壘를 튼튼히 하고서 기다리라.” 하니, 趙盾이 그의 말을 따라 싸우지 않고 굳게 성벽을 지키기만 하였다.

이때 마침 晉나라 대부 士會가 秦나라에 망명해 와 있었는데 秦伯이 士會에게 계책을 물으니, 士會가 “필시 趙氏의 부하로 새로 上軍의 補佐가 된 臾騈이 이 계책을 내어서 아군을 지치게 하려 하는 것입니다. 趙氏에게는 穿이라는 側室(支子)이 있는데, 바로 晉君의 사위로 총애를 받고 있으나 나이가 어려 軍事를 알지 못하고 용맹을 좋아하여 함부로 잘난 체하며 또 臾騈이 上軍의 補佐가 된 것을 미워하니, 경무장한 정예병을 시켜 한번 공격하고는 즉시 후퇴하게 한다면 晉軍과 싸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의 계책에 따라 晉나라의 上軍을 엄습하니, 趙穿이 이를 추격했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趙穿은 돌아와서 분노하여 말하기를 “양식을 싸 짊어지고 출동한 것은 적과 싸우기 위한 것인데, 적이 쳐들어와도 공격하지 않고 장차 무엇을 기다리겠다는 것인가[” 하였다. 軍吏가 “적이 지치기를 기다려 교전해야 합니다.” 하였으나, 趙穿은 “나는 그런 계책은 알지 못한다.” 하고, 군대를 거느리고 홀로 출격하였다.

趙盾은 이 말을 듣고 “秦나라에서 趙穿을 사로잡으면 晉나라의 한 卿을 잡는 것이니, 秦軍이 승리하고 돌아간다면 우리가 돌아가서 무어라고 보고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全軍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싸우다가 양군이 모두 동시에 퇴각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 12년≫

交綏는 서로 후퇴함을 이른다.

그러므로 최고의 군대는 남의 계책을 정벌하니, 이는 적의 계책을 깨뜨려서 적의 군대를 항복시키고 굳이 적과 싸우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계책을 정벌하는 일은 하나에 그치지 않는다. 혹은 적이 장차 우리를 정벌하고자 꾀하거든 우리가 먼저 그 계책을 깨뜨림으로써 적이 우리를 정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예컨대 晏嬰이 范昭가 자기를 방어하려는 계책을 깨뜨린 것과 같다.

우리가 마침내 적의 계책을 깨뜨려서 적으로 하여금 우리와 싸우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예컨대 春秋時代에 秦나라와 晉나라가 서로 항거할 적에 晉나라 臾騈이 趙盾을 위하여 계책을 내어서 보루를 높이 쌓아 군대를 굳게 지키고 秦나라와 交戰하지 않자, 秦나라 士會가 趙穿을 습격할 것을 도모하니, 趙盾이 마침내 모두 나와 싸우다가 서로 군대를 후퇴시킨 것이 이것이다.


其次는 伐交요

그다음은 敵의 外交를 정벌하는 것이요,

其次者는 伐人之交니 卽下文에 威加於敵이면 則其交不得合之意라 張儀說秦하여 以地六百里로 與楚懷王하여 請絶齊交1)하고 隨何於黥布座上에 殺楚使者하여 以絶項羽2)하고 曹公이 與韓遂交馬語하여 以疑馬超3)하고 高洋이 遣蕭淵明하여 請和於梁하여 以疑侯景4)하니 此皆伐交之道라

1) 張儀說秦……請絶齊交:張儀([〜B.C. 309)는 戰國時代 魏나라 출신의 縱橫家이다. 合從策을 제창한 蘇秦과 더불어 鬼谷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蘇秦의 주선으로 秦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여 惠文王 때 재상이 되었다. 連橫策을 주창하여, 蘇秦의 合從策으로 연합해 있던 六國을 설득해서 合從을 깨뜨리고, 秦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맺게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장의는 楚 懷王에게 靑山의 땅 600리를 주겠다고 속여 楚나라와 齊나라의 동맹을 깨뜨렸다. 惠文王이 죽은 뒤 실각되자 魏나라로 피신하여 재상이 되었으나 1년 만에 죽었다. ≪史記 권70 張儀列傳≫

2) 隨何於黥布座上……以絶項羽:隨何는 漢나라와 楚나라가 천하를 다툴 적에 漢王 劉邦을 도운 책사이고, 黥布는 英布로 六縣 사람인데 項羽 밑에서 큰 공을 세워 項羽에 의해 九江王으로 봉해진 인물이다.

B.C. 204년, 漢王 劉邦이 楚나라를 공격하였으나 彭城에서 패하자, 九江王 黥布를 설득해서 項羽를 배신하게 하여 몇 달의 시간을 벌고자 하였는데, 謁者로 있던 隨何가 자신이 가서 黥布를 설득하겠다고 자청하였다. 隨何를 만난 黥布는 은밀히 楚나라를 배반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감히 이 말을 공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楚나라의 使者가 淮南에 와서 黥布에게 군대를 출동시키라고 독촉하고 있었는데, 隨何가 곧바로 들어가 楚나라 使者의 上席에 앉으면서 “九江王이 이미 漢나라에 귀의했는데, 어떻게 군대를 출동시킨단 말인가.”라고 호통치니, 黥布는 대경실색하였고, 楚나라 사자는 즉시 자리를 떠났다. 隨何는 곧바로 黥布를 설득하기를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楚나라 사자를 죽여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빨리 漢나라로 달려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하니, 黥布가 마침내 楚나라 사신을 죽이고 군대를 일으켜 楚나라를 공격하였다. ≪史記 권91 黥布列傳≫

3) 曹公……以疑馬超:曹公은 後漢 말기의 승상 曹操를 가리킨다. 211년, 西涼에 있던 馬超가 韓遂와 힘을 합해 曹操를 공격하여 潼關에서 대치하였는데, 曹操는 馬超와 韓遂를 이간하기 위해, 馬超가 여러 차례 도전하였으나 출전하지 않고, 馬超가 땅을 떼어달라고 요청하자 거짓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韓遂와 평소 지면이 있었던 曹操가 馬上에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군대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다만 옛날 서울에서 지내던 일을 이야기하며 손을 잡고 환담을 나누었다. 馬超가 韓遂에게 대화의 내용을 묻자, 韓遂는 사실대로 대답했으나 馬超는 韓遂가 거짓말한다고 여기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曹操는 또 韓遂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刪削을 많이 하여, 韓遂가 그 편지를 고친 것처럼 보이도록 꾸미자 馬超는 이것을 보고 더욱 韓遂를 의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馬超와 韓遂는 틈이 벌어져 결국 曹操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三國志 권1 武帝紀≫

4) 高洋……以疑侯景:高洋(529~559)은 南北朝時代 東魏의 실권을 장악한 재상으로 뒤에 北齊를 창건한 인물이며,侯景([〜552)은 본래 東魏의 장군이었다가 梁나라에 귀순하였으며 뒤에 漢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547년, 東魏의 장수로 있던 侯景이 南朝의 梁나라에 투항할 의사를 표명하자, 梁 武帝는 侯景을 大將軍 兼 河南王으로 봉하기로 하고, 조카 蕭淵明에게 병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그를 영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蕭淵明이 북상 도중에 東魏軍의 기습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자, 侯景은 800여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梁나라의 壽陽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東魏의 재상인 高洋이 포로로 잡고 있던 蕭淵明을 梁나라에 돌려보내 화친을 청하니, 자신의 입지에 불안을 느낀 侯景은 마침내 548년에 梁나라를 배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梁書 권6 敬帝本紀≫, ≪梁書 권56 侯景列傳≫

그다음은 남의 外交를 정벌하는 것이니, 곧 아래 <九地>편의 ‘위엄을 敵에게 가하면 적의 외교가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張儀는 秦나라를 설득하여 600리 되는 땅을 楚 懷王에게 주어서 齊나라와 절교하도록 청하였고, 隨何는 黥布가 있는 자리에서 楚나라 사신을 죽여서 項羽를 끊게 하였고, 曹操는 韓遂와 馬上에서 서로 말을 주고받아 馬超를 의심하게 하였고, 高洋은 蕭淵明을 보내어 梁나라에 화친을 청하게 해서 侯景을 의심하게 하였으니, 이는 모두 외교를 정벌하는 방도이다.


其次는 伐兵이요

그다음은 적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고,

又其次者는 則以己之兵으로 伐人之兵이니 謂嚴隊伍하고 利器械하여 以伐人之兵耳라

또 그 다음은 자기의 군대를 가지고 남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니, 隊伍를 엄격하게 하고 병기를 예리하게 하여 남의 군대를 공격함을 이른다.


其下는 攻城이니

그다음은 城을 공격하는 것이니,

其兵之下者는 務攻人之城이라 故로 攻城이 爲兵家之下計라

用兵 가운데 가장 낮은 것은 남의 城을 공격함에 힘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城을 공격하는 것이 兵家의 下策이 되는 것이다.


攻城之法은 爲不得已니라

城을 공격하는 방법은 부득이해서이다.

攻城則力屈이라 故로 攻城之法이 爲出於不得已焉耳라

城을 공격하면 힘이 쇠한다. 그러므로 城을 공격하는 방법은 부득이한 경우에서 나올 뿐이다.

修櫓轒轀(분온)하고 具器械를 三月而後에 成하고

큰 방패와 轒轀을 수리하고 器械(攻城 장비)를 구비하는 것은 3개월이 지난 뒤에 이루어지며,

櫓者는 大楯也라 轒轀者는 四輪車也니 排大木爲之하여 下容數十人하니 上蒙以皮하고覆之以土하여 使木石不能傷也라 器械者는 總攻城之備而言하니 衝車, 臨車, 鉤車, 飛樓, 雲梯, 蝦蟆(하마)木, 蟹合車, 孤鹿車, 影車, 高陣車, 馬頭車, 獨行車, 運土豚魚車之類 皆在其中也라 言修櫓與攻城之車하고 具合用之器械인댄 大約三月而後에 能成就라

櫓는 큰 방패이다. 轒轀은 네 바퀴가 달린 수레이니, 큰 나무를 배열하여 만든 것으로 아래에 사람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 兵車이니, 위에는 가죽을 씌운 다음 흙으로 덮어서 나무와 돌에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器械는 城을 공격하는 장비를 총괄하여 말하였으니, 衝車․臨車․鉤車․飛樓․雲梯․蝦蟆木․蟹合車․孤鹿車․影車․高陣車․馬頭車․獨行車․흙을 운반하는 豚魚車 같은 따위가 모두 이 안에 들어 있다.

큰 방패와 城을 공격하는 수레를 수리하고 마땅히 사용하여야 할 장비를 갖추려면 대략 3개월이 지난 뒤에야 成就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距闉(거인)을 又三月而後已니라

距闉을 또 3개월이 지난 뒤에 끝마칠 수 있는 것이다.

距闉者는 土山也니 積土爲山하여 以臨敵城이니 或觀其虛實하며 或毁其樓櫓하며 或乘高設計而入城하나니 又大約三月而後에 能止也라

距闉이란 흙으로 만든 산이니, 흙을 쌓아 산을 만들어서 적의 城을 굽어보는 것이다. 혹은 적의 虛實을 관찰하며 혹은 적의 망루를 허물며 혹은 높은 곳에 올라가 계책을 써서 적의 城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이 또한 대략 3개월이 지난 뒤에야 끝마칠 수 있다.


將不勝其忿而蟻附之하여 殺士卒三分之一이로되 而城不拔者는 此는 攻城之災也니라

공격하는 장수가 분노를 이기지 못하여 兵士들을 개미떼가 붙어 城에 올라가듯이 해서 병사 3분의 1을 죽이고도 적의 城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은, 이는 城을 공격하는 재앙인 것이다.

爲將者 以其日久로 不勝其忿怒하여 使士卒如蟻附攻之하여 士卒爲城上敵人所殺이 三分中에 去其一分이로되 而城堅하여 終不能拔者는 此攻城之災也라 如後魏武帝攻宋臧質于盱眙(우이)할새 使士卒로 分番相代하여 墜而復升하여 死者屍與城平호되 終不能拔1)이 是也라

1) 後魏武帝……終不能拔:後魏는 중국의 南北朝時代에 鮮卑族인 拓跋珪가 386년에 華北에서 건국한 나라로 534년에 멸망하였고, 宋나라는 東晉의 武將이던 劉裕(363〜422)가 420년에 東晉의 恭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나라로 479년에 멸망하였다. 臧質은 宋나라의 장수이고, 盱眙는 安徽省 鳳陽縣 동쪽에 있던 縣으로 戰國時代에 楚 懷王이 이곳에 도읍을 하기도 하였다.

後魏의 武帝가 宋나라의 臧質이 지키는 盱眙城을 공격하였으나, 城이 워낙 견고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다. 後魏軍은 突擊戰으로 城에 육박하여 番을 나누어 서로 교대하게 해서 城에 오르다가 떨어지면 다시 올라가게 하니, 전사한 시체가 성의 높이와 같았다. 이와 같은 격전이 30일 동안이나 계속되어 전사자가 全軍의 절반에 이르렀다. ≪宋書 권74 臧質列傳≫

장수 된 자가 날짜가 오래 지체된다 하여 분노를 이기지 못해서 병사들로 하여금 개미떼가 붙어 올라가듯이 城을 공격하게 해서, 병사 중에 城 위에 있는 敵兵들에게 살해된 숫자가 3분의 1인데도 城이 견고하여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城을 공격하는 재앙인 것이다.

예컨대 後魏의 武帝가 宋나라의 臧質을 盱眙에서 공격할 적에 병사들로 하여금 番을 나누어 서로 교대하게 해서, 城에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다시 올라가게 하여 죽은 시체가 쌓여 높이가 城과 비슷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한 것이 이것이다.


故로 善用兵者는 屈人之兵而非戰也요

그러므로 用兵을 잘하는 자는 남의 군대를 굴복시키되 전쟁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故로 善能用兵者는 屈服敵人之兵而非用戰也니 謂或破其謀하고 或敗其交하며 或絶其糧하고 或斷其路하여 不用戰而服之니 如田穰苴明法令하고 撫士卒에 燕將聞之하고 不戰而退1) 是也라

1) 田穰苴明法令……不戰而退:田穰苴는 춘추시대 齊나라의 장수로 司馬穰苴라고도 칭한다. 齊 景公 때에 晉나라와 燕나라가 齊나라를 침공하자, 晏嬰은 田穰苴를 大將으로 임명할 것을 청하였다. 穰苴는 평소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大將軍이 되자 軍律을 엄격히 지키고 紀綱을 바로 세웠으며, 兵士들을 잘 어루만지니, 燕나라 장수는 이 소식을 듣고 그대로 후퇴하였으며, 晉나라 역시 침공을 중지하였다. ≪史記 권64 司馬穰苴列傳≫

그러므로 用兵을 잘하는 자는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되 전쟁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그 적의 계책을 깨뜨리고 혹은 그 외교를 깨뜨리며 혹은 그 군량의 수송로를 끊고 혹은 그 길을 차단해서 싸우지 않고 복종시킴을 말한 것이니, 예컨대 田穰苴가 법령을 분명히 하고 병사들을 어루만지자, 燕나라 장수가 이 소식을 듣고 싸우지 않고 후퇴한 것이 이것이다.


拔人之城而非攻也요

남의 城을 함락시키되 공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拔取人之城而非用攻也니 如文王伐崇에 因壘而降1)하고 慕容恪築室反畊하고 嚴固圍壘하여 終克段龕(단감)於廣固하여 兵不血刃2)이 是也라

1) 文王伐崇 因壘而降:이 사례는 114쪽 주 1) 참조.

2) 慕容恪……兵不血刃:慕容恪(321〜367)은 南北朝時代 前燕의 명장이고, 段龕은 鮮卑族 段氏部族의 酋長으로 前燕을 배반하고 南朝의 東晉과 결탁하여 東晉으로부터 齊公 칭호를 받은 軍閥이며, 廣固는 山東省 益都縣에 있는 城으로 段龕의 근거지인데, 뒤에 南燕의 慕容德이 이곳을 도읍으로 삼기도 하였다.

356년, 前燕의 장군 慕容恪이 段龕을 정벌하기 위해 廣固를 공격하였는데, 攻城戰을 하지 않고 1년 가까이 포위하자 마침내 段龕이 성을 나와 항복하였다. ≪晉書 권111 慕容恪≫

남의 城을 함락하여 점령하되 공격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니, 예컨대 周 文王이 崇나라를 정벌할 적에 예전의 보루를 그대로 사용하여 항복받고, 慕容恪은 적의 백성들이 집을 짓고 돌아가 농사짓게 하면서 수비를 엄격히 하고 보루를 포위하여 끝내 段龕을 廣固에서 이겨 병사들이 병기에 피를 묻히지 않은 것이 이것이다.


毁人之國而非久也니

남의 나라를 훼손하되 오랫동안 하는 것이 아니니,

毁人之國而非久也는 謂乘勢가 如摧枯拉朽之易라 如沛公取秦하고 晉平吳하고 隋平陳하고 宋太祖平蜀에 皆不用久也1)라

1) 沛公取秦……皆不用久也:沛公은 漢 高祖 劉邦을 가리킨다. 劉邦은 B.C. 209년 향리에서 병사를 일으키고 이듬해에 북진하여 項羽와 연합하였으며, 그 후 項羽 軍이 동쪽에서 秦軍의 주력부대와 결전을 벌이는 사이에 서쪽 關中으로 진격하여 B.C. 206년 10월에 秦나라의 수도 咸陽을 함락시키고, 秦王 子嬰의 항복을 받으니, 불과 1개월만의 일이었다.

晉 武帝 司馬炎은 279년 11월, 杜預와 王濬으로 하여금 吳나라를 정벌하게 하여 280년 3월에 吳主 孫皓의 항복을 받아 60년에 걸친 삼국 분열의 시대를 종식시키니, 정벌을 개시한 지 불과 반년만의 일이었다.

隋 文帝 楊堅은 588년 11월에 南朝의 마지막 왕조인 陳나라를 공격하여 이듬해인 589년 1월에 陳을 평정하니, 정벌을 개시한 지 3개월이 채 못 되었다.

宋 太祖 趙匡胤은 964년 11월에 蜀의 정벌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965년 1월에 평정하니, 역시 정벌을 개시한 지 3개월이 못 되었다.

남의 나라를 훼손하되 오랫동안 하지 않는 것은 형세를 탐이 마른 나뭇가지를 꺾고 썩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듯이 쉽게 함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예컨대 沛公이 秦나라를 점령하고, 晉나라가 吳나라를 평정하고, 隋나라가 陳나라를 평정하고, 宋 太祖가 蜀나라를 평정할 적에 모두 전쟁을 오래하지 않은 것과 같다.


必以全爭於天下라 故로 兵不頓而利可全이니 此謀攻之法也라

반드시 온전함으로써 천하에 다툰다. 그러므로 兵器가 무뎌지지 않고도 이로움을 온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謀攻’의 법이다.

全爭者는 不戰하고 屈人之兵이면 則士不傷이요 不攻하고 拔人之城이면 則力不屈이요 不久하고 毁人之國이면 則財不費니 必以完全으로 立勝於天下라 故로 兵不頓而利可全得之니 此乃謀攻之法也라

‘온전함으로 다툰다.’는 것은 적과 싸우지 않고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면 병사들이 상하지 않고, 공격하지 않고 적의 城을 점령하면 힘이 쇠하지 않는 것이고, 오래하지 않음으로 남의 나라를 훼손하면 재물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니, 반드시 완전함으로써 天下에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기가 무뎌지지 않고도 이익을 온전히 얻을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謀攻’의 법이다.


故로 用兵之法은 十則圍之하고

그러므로 用兵하는 법은 병력이 10배가 되면 포위하고,

故로 用兵之法은 吾軍이 十倍於敵이면 則可四面合圍하여 使敵不能逃也니 此는 言將智勇等而兵利鈍均者 如此라 若主弱客强이면 不必十倍然後圍之也라

그러므로 用兵하는 법은 우리 군대가 적보다 10배가 많으면 四面에서 완전히 포위하여 적으로 하여금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두 나라 장수의 지혜와 용맹이 대등하고 병기의 날카롭고 무딘 것이 비슷한 경우가 이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만약 수비하는 나라가 약하고 공격하는 나라가 강하면 굳이 10배가 된 뒤에 포위할 것이 없다.


五則攻之하고

병력이 5배가 되면 공격하고,

吾軍이 五倍於敵이면 則可驚前掩後하고 衝東擊西하여 而攻取之니 若敵無外援하고 矢竭糧盡이면 不必五倍然後攻之也라

우리 군대가 적보다 5배가 많으면 앞을 놀라게 하고 뒤를 기습하며 동쪽을 찌르고 서쪽을 쳐서 적을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으니, 만약 적이 외부의 지원이 없고 화살이 消盡되고 식량이 고갈되면 굳이 5배가 된 뒤에 공격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倍則分之하고

군대가 2배 많으면 둘로 나누고,

吾軍이 加倍於敵이면 則可分爲二部하여 一以當其前하고 一以衝其後하여 或襲之於左하고 或掩之於右也라

우리 군대가 적보다 갑절이 많으면 나누어 두 부대로 만들어서, 한 부대는 적의 전면을 막고 한 부대는 적의 후면을 충돌하며, 혹은 왼쪽에서 습격하고 혹은 오른쪽에서 엄습하는 것이다.


敵則能戰之하고

병력이 적과 대등하면 싸우고,

若彼我勢相敵이면 則當變化奇正하여 用己所能而戰之라

만약 적과 우리의 軍勢가 서로 대등하면 마땅히 奇․正을 변화해서 자신의 능한 바를 사용하여 싸우는 것이다.


少則能逃之니

병력이 적보다 적으면 도망하여야 하니,

我軍少於敵이면 則當盡其能忍之心하여 且暫逃之하여 伺其隙而乘其弊然後에 襲而掩之라 此亦以將智勇等而兵利鈍均者로 言之니 若我治彼亂하며 我奮彼怠하며 我佚彼勞하며 我飽彼饑면 雖少나 亦可與衆者合戰이니 若吳起以五百乘으로 破秦五十萬1)하고 謝玄以八萬으로 破苻堅一百萬2)하고 宇文泰以一萬으로 破高歡十萬3)하니 何必逃哉리오

1) 吳起以五百乘 破秦五十萬:500乘은 옛날의 戰車 500대로, 戰車 1乘에는 甲士가 3명, 步兵이 72명, 취사병이 25명이어서, 도합 100명이 되므로, 500乘은 5만 명이 된다. 吳起는 정예병을 뽑아 秦나라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다시 취약한 병력 5만 명을 훈련시켜 秦나라를 공격해서 秦나라의 5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吳子 應變≫

2) 謝玄以八萬 破苻堅一百萬:謝玄(343〜388)은 東晉의 장수이며, 苻堅은 前秦의 군주이다. 東晉 太元 연간(383)에 前秦의 苻堅이 백만 대군을 이끌고 東晉을 공격하니, 東晉은 謝玄과 劉牢之 등에게 8만 명을 주어 이를 막게 하였는바, 자세한 내용은 88쪽 주 1) 참조.

3) 宇文泰以一萬 破高歡十萬:宇文泰(507〜556)는 西魏의 丞相으로 뒤에 北周를 건국한 宇文覺의 부친이다. 高歡(496〜547)은 東魏의 丞相으로 뒤에 아들 高洋이 北齊를 창건하여 神武帝로 추존되었다.

西魏 大統 3년(537), 宇文泰가 高歡을 맞아 싸울 적에 諸將을 불러 이르기를 “高歡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멀리 이곳에 왔으니, 이것은 하늘이 그를 망치려 하는 것이다. 내가 高歡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諸將들은 모두 衆寡不敵이라 하면서 반대하였다. 그러나 宇文泰는 “高歡이 만약 咸陽으로 오면 우리의 민심이 더욱 소란할 것이니, 지금 그가 새로 왔을 때에 공격해야 한다.” 하고는, 즉시 渭水에 浮橋를 만들고 장병들에게 3일분의 군량만을 갖고 가게 하였다.

高歡은 宇文泰 軍이 왔다는 말을 듣고 즉시 병력을 이끌고 會戰하러 왔다. 宇文泰는 背水陣을 치고 高歡의 군대를 두 개로 갈라놓아 대파하고 6천여 명을 참수하였으며, 항복한 자가 2만여 명이었다. 高歡이 밤을 타 도망치자 추격하여 황하에 이르러 다시 크게 승리하였다. ≪周書 권2 文帝 下≫

우리 군대가 적보다 적으면 마땅히 인내하는 마음을 다해서 우선 잠시 도망하였다가, 적의 틈을 엿보아 그들이 피폐한 틈을 타서 기습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이 또한 두 나라 장수의 지혜와 용맹이 대등하고 병기의 예리하고 둔함이 비슷한 경우를 가지고 말한 것이니, 만약 우리 군대가 잘 정돈되고 저들이 혼란하며, 우리 군대가 분발하고 저들이 태만하며, 우리 군대가 편안하고 저들이 수고로우며, 우리 군대가 배부르고 저들이 굶주린다면, 비록 병력의 수가 적더라도 많은 군대와 교전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吳起가 500乘의 군대로 秦나라의 50만 대군을 격파하였고, 謝玄이 8만 명의 병력으로 苻堅의 1백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며, 宇文泰가 1만 명의 병력으로 高歡의 10만 대군을 격파하였으니, 어찌 굳이 도망할 필요가 있겠는가.


不若則能避之니라

우리 군대가 적만 못하면 피하여야 한다.

我軍勢力이 不如敵人이면 則能引而避之하여 以伺其便이니 如少延緩不避라가 恐敵人守我要害하여 合而圍我면 則欲去나 不復可得也1)라

1) 不如敵人……不復可得也:≪孫子髓≫에는 “본문의 ‘不若’은 병력이 적고 또 수비할 수 없으면 병력을 이끌고 떠나가야 함을 말한 것이니, 오히려 굳게 지키다가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낫다.[不若者 謂少而又不能守 則引而去之 猶愈於堅而擒也]” 하였다.

우리 군대의 세력이 적보다 못하면 군대를 이끌고 피하였다가 편리한 틈을 타야 하니,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하고 피하지 않았다가 적이 우리의 要害處를 지켜서 우리를 완전히 포위하면 떠나려고 해도 다시 갈 수 없을까 염려해서이다.


故로 小敵之堅은 大敵之擒也니라

그러므로 약한 군대가 굳게 지킴은 강한 적에게 사로잡히는 것이다.

故로 小敵이 不量己之力하고 不能逃, 不能避하여 而堅與人戰이면 則必爲大敵之所擒이니 如息侯屈於鄭伯1)하고 李陵降於匈奴2) 是也라

1) 息侯屈於鄭伯:≪春秋左氏傳≫ 隱公 11년에 이 내용의 顚末과 史評이 아래와 같이 보인다.

“鄭나라와 息나라가 言語 문제로 서로 불화하여 息侯가 鄭나라를 공격하였으나, 대패하고 돌아갔다. 君子는 이 일로 인해 息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았다. 덕을 헤아리지도 않고 힘을 요량하지도 않고 친척을 가까이하지도 않고 말의 시비를 따지지도 않고 죄가 있는지의 여부를 살피지도 않았다. 이 다섯 가지 잘못을 범하고서 남을 공격하였으니, 병사를 잃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2) 李陵降於匈奴:李陵([〜B.C. 74)은 前漢의 장군이었다가 匈奴에 투항하여 匈奴의 제후가 된 인물이다.

B.C. 99년, 漢 武帝가 貳師將軍 李廣利로 하여금 3만의 騎兵을 이끌고 酒泉으로 진격하게 하였는데, 天山에서 오랑캐의 酋長을 포로로 잡고 1만여의 首級을 노획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세우고 回軍하다가, 匈奴의 대군에게 포위되어 절반이 넘는 병사가 죽는 대패를 당하였다. 분노한 武帝가 騎都尉 李陵으로 하여금 步兵과 騎兵 5천을 거느리고 匈奴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李陵은 흉노의 대군과 會戰하여 적은 병력으로 흉노의 1만여 명을 살상하는 등 분전하였으나, 匈奴의 대군에 포위되어 군대가 전멸될 위기에 처하자, 결국 匈奴에 항복하였다. ≪史記 권110 匈奴列傳≫

그러므로 약한 군대가 자기의 힘을 헤아리지 아니하여 도망가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고서 굳게 적과 싸우면 반드시 강한 적에게 사로잡히는 것이다. 예컨대 息侯가 鄭伯에게 굽히고 李陵이 匈奴에게 항복한 경우가 이것이다.


夫將者는 國之輔也니 輔周則國必强하고 輔隙則國必弱이니라

장수란 자는 나라의 輔佐이니, 輔佐가 주도면밀하면 나라가 반드시 강성해지고, 輔佐가 틈이 있으면 나라가 반드시 쇠약해진다.

夫將者는 國家之輔佐也니 輔佐之謀周密하여 敵人故不能窺면 則其國必然盛强하고 輔佐之謀 一有鏬隙하여 敵人乘釁而入이면 則其國必然衰弱이니라

장수란 자는 국가의 輔佐이니, 輔佐의 계책이 주도면밀하여 적들이 진실로 엿보지 못하면 그 나라가 반드시 강성하고, 輔佐의 계책이 조금이라도 허술한 틈이 있어서 적들이 틈을 타고 들어오면 그 나라가 반드시 쇠약해진다.


故로 軍之所以患於君者三이니

그러므로 군대가 군주에게 폐해를 당하는 경우가 세 가지이니,

故로 軍之所以見害於國君者 有三事라

그러므로 군대가 나라의 군주에게 폐해를 당하는 경우에 세 가지 일이 있는 것이다.


不知軍之不可以進하고 而謂之進하며 不知軍之不可以退하고 而謂之退를 是謂縻軍이니라

군대가 전진해서는 안 됨을 알지 못하고 전진하라고 명하며, 군대가 후퇴해서는 안 됨을 알지 못하고 후퇴하라고 명하는 것을 일러 ‘군대를 옭아맨다.’고 하는 것이다.

人君이 不知軍之不可以前進하고 而命之前進하며 不知軍之不可以後退하고 而命之後退를 是謂縻繫其軍者也니 謂人君不令大將自裁進退之道하고 或遣使命하여 必令決戰이니 孫皓臨滅에 賈充이 尙請班師1)하고 甚者는 如哥舒翰守潼關에 祿山兵强하여 未可與戰이어늘 玄宗이 强命之戰하여 遂至於敗2) 是也라

1) 孫皓臨滅 賈充尙請班師:孫皓(242〜284)는 삼국시대 吳나라 최후의 황제로 孫權의 셋째 아들인 孫和의 서장자이다. 烏程侯로 봉해졌다가 景帝인 孫休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賈充(217〜282)은 晉나라의 外戚이다.

280년, 晉 武帝가 吳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출동하였는데, 王浚이 吳軍을 대패시키고 武昌을 점령하여 吳나라의 수도 建康의 함락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이때 총사령관인 賈充은 武帝에게 表文을 올리기를 “吳나라는 한 번에 평정할 수 없으며, 지금은 무더운 여름철이므로 江淮 지역이 低濕하여 질병이 반드시 번질 것입니다. 여러 군대들을 소환하여 후일을 도모하소서. 일단 실패한 뒤에는 비록 吳나라 정벌을 주장한 張華의 허리를 베더라도 천하의 인민들에게 사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武帝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더욱 급히 공격을 가하게 하여 결국 吳나라를 평정할 수 있었다. ≪晉書 권40 賈充列傳≫

2) 哥舒翰守潼關……遂至於敗:哥舒翰([〜757)은 唐나라에 귀화한 突厥 출신의 武將으로 吐蕃을 토벌하여 西平郡王으로 봉해지는 등 玄宗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天寶 14년(755)에 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河西節度使로 있던 哥舒翰은 皇太子前鋒兵馬元帥에 임명되어 20만의 병력으로 潼關을 지키고 있었는데, 安祿山의 기세가 대단하자, 潼關을 굳게 지키며 적이 약해지기를 기다려 출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玄宗이 기어이 싸우도록 명령을 내리자 어쩔 수 없이 會戰하였다가 패하여 潼關이 함락되었고 玄宗은 할 수 없이 蜀으로 파천하였다. ≪舊唐書 권10 肅宗本紀≫

군주가 군대가 전진해서는 안 됨을 알지 못하고 전진하라고 명령하며, 군대가 후퇴해서는 안 됨을 알지 못하고 후퇴하라고 명령함을 일러 ‘그 군대를 옭아맨다.’고 하는 것이니, 군주가 대장으로 하여금 전진하고 후퇴하는 방도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지 않고, 혹은 사신을 보내 명령하여 반드시 결전하게 하는 것을 이른다.

吳나라의 孫皓가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賈充은 오히려 군대를 회군할 것을 청하였고, 심한 경우는 哥舒翰이 潼關을 지킬 적에 安祿山의 군대가 강성하여 맞서 싸울 수 없었는데도 玄宗이 억지로 싸우도록 명하여 마침내 패전에 이르게 한 것과 같은 경우가 이것이다.


不知三軍之事하고 而同三軍之政이면 則軍士惑矣요

三軍의 일을 알지 못하고 三軍의 정사를 함께 다스리고자 하면 병사들이 迷惑되고,

不知三軍戰守之事하고 而欲同理三軍之政이면 則軍士皆疑矣라 人君之職은 當修德行政하고 求賢任人而已요 而將은 受閫外之寄하여 無天於上하고 無地於下하며 無敵於前하고 無君於後하여 見可而進하고 知難而退하여 務在必勝이니 人君이 豈可以己意而縻之리오 漢唐이 多以中官爲監軍1)하니 其縻軍之患이 正如此하니라

1) 漢唐 多以中官爲監軍:中官은 宦官을 이른다. 漢나라와 唐나라 때에는 皇帝들이 宦官을 신임하여 將軍이 출전할 때에 이들을 監軍으로 임명해서 군대를 감독하고 將軍들의 행동을 제약하거나 將軍들을 정탐하게 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唐代에 심하여, 高力士․魚朝恩․李輔國 등이 宦官 출신으로서 監軍이 되어 將軍들의 權限을 제약하였다. ≪新唐書 권207 宦者列傳≫

三軍의 싸우고 수비하는 일을 알지 못하고 三軍의 정사를 함께 다스리고자 하면 병사들이 모두 의심한다. 군주의 직책은 마땅히 德을 닦고 정사를 행하며 賢者를 구하여 훌륭한 사람에게 관직을 맡길 뿐이요, 장수는 閫外(도성 밖)의 임무를 맡아서 위에는 하늘이 없고 아래에는 땅이 없으며 앞에는 적이 없고 뒤에는 군주가 없어서, 가능함을 발견하면 전진하고 어려움을 알면 후퇴하여 힘씀이 반드시 승리함에 있는 것이니, 군주가 어찌 자기 마음대로 장군을 옭아맬 수 있겠는가. 漢나라와 唐나라 때에 대부분 宦官을 監軍으로 삼았으니, 군대를 옭아맨 폐해가 바로 이와 같았다.


不知三軍之權하고 而同三軍之任이면 則軍士疑矣니라

三軍의 權變을 알지 못하고 三軍의 임무를 함께하고자 하면 병사들이 의심한다.

不知三軍權變之事하고 而欲同爲三軍之任이면 則軍士皆惑矣1)라

1) 不知三軍權變之事……則軍士皆惑矣:≪孫子髓≫에는 “원문의 ‘同’은 참여이고 ‘權’은 저울질하는 것이고 ‘惑’은 현혹이고 ‘疑’는 믿지 않는 것이니, 일을 알지 못하는데 그 정사에 관여하고 자기 임무가 아닌데 그 권세를 옮기면, 군사들의 마음이 의혹해서 주장하여 따를 바를 알지 못한다.[同 參也 權 稱也 惑 眩也 疑 不信也 不知事而干其政 非其任而移其權 則軍心疑惑 莫適所從也]” 하였다.

그리하여 權에 대한 해석이 위아래가 서로 맞지 않는바, 權은 자기 권세를 저울질하여 알맞게 하는 것으로 본 듯하다.

三軍의 權變의 일을 알지 못하고 三軍의 임무를 함께하고자 하면 병사들이 모두 의심한다.


三軍旣惑且疑면 則諸侯之難이 至矣리니 是謂亂軍引勝이니라

三軍이 이미 미혹하고 의심하면 諸侯의 반란이 이를 것이니, 이것을 일러 ‘자기의 군대를 혼란스럽게 하여 적에게 승리를 안겨준다.’는 것이다.

三軍之衆이 旣惑且疑면 則諸侯乘隙而攻伐之하리니 難必至矣라 是謂自亂其軍而引敵人之勝이라

三軍의 무리가 이미 미혹하고 또 의심하면 제후들이 허술한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이니, 난리가 반드시 이를 것이다. 이것을 일러 ‘스스로 자기의 군대를 혼란스럽게 하여 적에게 승리를 안겨준다.’는 것이다.


故로 知勝有五하니 知可以與戰과 不可以與戰者는 勝하고

그러므로 승리를 아는 방법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적과 더불어 싸울 수 있음과 싸울 수 없는 것을 아는 자는 승리하고,

故로 知勝之道 有五하니 知可以與敵戰과 或不可以與敵戰者는 勝이니 如吳起所謂有不卜而與之戰者八이요 有不占而避之者六1)이 是也라

1) 吳起……有不占而避之者六:이 내용은 ≪吳子≫ <料敵>에 그대로 보인다.

그러므로 승리를 아는 방법이 다섯 가지가 있으니, 적과 더불어 싸울 수 있으며 혹 적과 더불어 싸울 수 없음을 아는 자는 승리한다. 예컨대 吳起의 이른바 ‘점치지 않고도 적과 더불어 싸워야 할 것이 여덟 가지가 있고, 점치지 않고도 피하여야 할 것이 여섯 가지가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識衆寡之用者는 勝하고

많은 병력과 적은 병력의 쓰임을 아는 자는 승리하고,

識敵人之勢하여 或當用衆하고 或當用寡者는 勝하나니 用衆者는 務易하고 用寡者는 務隘1)라 又如秦王欲伐楚한대 王翦曰 非六十萬人이면 不可2) 是也라

1) 或當用衆……務隘:≪孫子髓≫에는 “원문의 ‘識衆寡之用者 勝’은 戰陣을 가지고 말한 경우가 있으니, ≪司馬法≫에 ‘적은 병력을 사용할 경우에는 진영을 견고하게 사용하여야 하고 많은 병력을 사용할 경우에는 대오를 질서 정연하게 다스려야 하며, 병력이 적으면 군대를 번거롭게 이용하여 많은 것처럼 보이고 병력이 많으면 정상적으로 운용하는 것이 이롭다.[用寡固 用衆治 寡利煩 衆利正]’고 한 것이 이것이요, 지형을 가지고 말한 경우가 있으니, ≪吳子≫의 ‘많은 병력을 사용할 경우에는 평지에서 싸우고 적은 병력을 사용할 경우에는 좁은 곳에서 싸워야 한다.[用衆務易 用少務隘]’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하였다.

2) 秦王欲伐楚……不可:王翦은 戰國時代 말기 秦나라의 장군으로, 秦나라의 白起와 趙나라의 李牧, 廉頗와 함께 戰國 4대 명장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始皇帝가 楚나라를 정벌할 결심을 굳히고 당시 연소하고 용맹한 장군 李信에게 병력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묻자 李信은 20만 명이면 충분하다고 대답하였고, 다시 백전노장 王翦에게 물으니, 王翦은 60만 명이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始皇帝가 “왕장군은 늙었다. 어찌 이리도 겁이 많은가. 이장군은 과연 그 기세가 용감하도다. 그의 말이 옳다.”라고 하고, 李信과 蒙恬으로 하여금 20만 명을 거느리고 楚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李信과 蒙恬은 처음에는 승리하였으나, 楚軍의 기습 공격을 받아 대패하고 돌아왔다. 秦始皇은 王翦에게 사과하고 楚나라를 다시 공격해줄 것을 청하였다. 王翦은 “大王께서 臣을 꼭 쓰시겠다면 60만 병력이 아니면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秦始皇이 허락하고 온 국력을 기울여 60만 대군을 맡겨주자, 王翦은 이들을 거느리고 출전하여 楚나라를 점령하였다. ≪史記 권73 王翦列傳≫

적의 軍勢를 잘 알아서 혹은 마땅히 많은 병력을 써야 하고 혹은 마땅히 적은 병력을 써야 할 것을 아는 자는 승리하니, 많은 병력을 쓸 경우에는 평지에서 싸워야 하고, 적은 병력을 쓸 경우에는 좁은 곳에서 싸워야 한다. 또 秦王이 楚나라를 정벌하려고 하자, 王翦이 말하기를 “60만 병력이 아니면 불가하다.” 한 것이 이것이다.


上下同欲者는 勝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욕망을 함께하는 자는 승리하고,

上下之心同欲者는 勝하나니 所謂仁人之兵은 上下一心하고 三軍同力1)者 是也라 若人人欲戰이면 豈有不勝者哉리오

1) 仁人之兵……三軍同力:이 내용은 荀子(荀況, B.C. 313~B.C. 238)가 臨武君과 趙나라 孝成王 앞에서 兵法을 논할 적에 말한 것으로 다음과 같이 보인다.

“仁人의 군대는 상하가 서로 사랑하고 모든 장수들이 한마음이며, 三軍이 힘을 함께하여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랫사람들이 위에 충성하는 것이 마치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고 아우가 형을 섬기는 것과 같으며, 손과 팔이 머리와 눈을 보호하고 가슴과 배를 덮어주는 것과 같게 합니다. 이것은 일러 仁人의 군대라 하는 것입니다.” ≪荀子 권10 議兵≫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이 욕망을 함께하는 자는 승리한다. 이른바 ‘인자한 사람의 군대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한마음이 되고 三軍이 힘을 함께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만약 병사들이 사람마다 모두 싸우고자 한다면 어찌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겠는가.


以虞待不虞者는 勝하고

대비함으로써 대비하지 못한 적을 상대하는 자는 승리하고,

以有備虞로 而待敵人之無備虞者는 勝이니 如趙奢厚集其陣하여 以待秦兵1)하고 孫臏設伏以待龐涓(방연)2)이 是也라

1) 趙奢厚集其陣 以待秦兵:B.C. 270년, 秦나라가 韓나라를 치기 위해 閼與를 포위하자, 趙王은 趙奢를 將軍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보냈는데, 趙奢가 秦軍을 대파하고 포위된 閼與를 구원하였다. 자세한 과정과 戰術은 83쪽 주 1) 참조.

2) 孫臏設伏以待龐涓(방연):B.C. 341년, 魏나라가 趙나라와 연합하여 韓나라를 공격하자, 韓나라는 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齊나라는 田忌를 장수로 삼고 孫臏을 軍師로 삼아 韓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孫臏은 협소한 馬陵에 군대를 매복하였다가 밤중에 추격해 오는 龐涓의 魏軍을 대파하였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서의 <孫子本傳> 참조.

대비함이 있음으로써 대비하지 못한 적을 상대하는 자는 승리하니, 예컨대 趙奢가 자기의 진영에 병력을 많이 집결하여 秦나라 군대를 대비하고, 孫臏이 매복을 설치하여 龐涓을 기다린 것이 이것이다.


將能而君不御者는 勝하나니

장수가 유능한데 군주가 制御(통제)하지 않는 자는 승리한다.

大將有能에 而國君不制御者는 勝하나니 如夏侯(敦)[惇]이 有大帥之略에 而曹操假以節度하여 便宜從事1) 是也라 若夫將帥不能이어든 人君必當授以成算이니 如後魏太武命將出師에 從命者 無不致勝하고 違命者 率多毁失2)하며 齊神武任用將帥出討에 奉行方略이면 罔不克捷하고 違失指敎면 多致奔亡3)하니 是는 將不能而君能이니 又安得不御之耳리오

1) 夏侯(敦)[惇]……便宜從事:저본의 ‘敦’은 ‘惇’의 오자이다. 夏侯惇([〜220)은 삼국시대 曹操 막하의 名將으로, 曹操의 종제로서 兵法에 통달하고 직무에 충실하여 曹操의 신임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曹操가 河北을 평정할 적에 大將軍이 되어 후방에서 적을 막았으며, 鄴郡을 격파하자 曹操는 그를 伏波將軍으로 삼고 종전의 직책을 겸임하게 하면서 제도와 규칙에 구애받지 말고 편의에 따라 업무를 처리 시행하도록 하였다. ≪三國志 권9 諸夏侯曹傳≫

2) 後魏太武……率多毁失:太武帝는 南北朝時代 後魏의 제3대 황제인 世祖로 華北을 통일하고 南朝의 宋나라를 압박하여 쇠퇴하게 한 군주이다. 太武帝는 적과 싸울 적에 항상 병사들과 함께 앞장서서 矢石을 무릅쓰고 싸워, 병사들이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하여 거의 모든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장수에게 명하여 출병할 적에도 명령을 따르는 자는 승리하지 않음이 없고 명령을 어긴 자는 대부분 패망을 당하였다. ≪魏書 권4 下 世祖紀≫

3) 齊神武……多致奔亡:齊나라의 神武帝는 東魏의 승상으로 있다가 뒤에 北齊를 건국한 高歡(496〜547)을 가리킨다. 高歡은 後魏가 東魏와 西魏로 분열될 당시 孝靜帝를 세워 鄴으로 천도하면서 東魏의 승상이 되어 西魏의 승상인 宇文泰와 대립하였다. 神武帝는 機略과 權道를 구사할 적에는 변화무쌍하기가 귀신과 같았으며, 軍國에 관한 큰 계략을 쓸 적에는 독단으로 운용하여 文武의 장수와 관리들이 이를 예측하는 자가 드물었다. 병사들을 통솔함에 법령이 엄숙하였으며, 장수를 임용하여 나아가 토벌할 적에는 그의 方略을 받들어 시행하면 대부분 승리하였고 지시와 가르침을 어기면 대부분 패망하였다. ≪北齊書 권2 補帝紀 神武帝 高歡 下≫

대장이 재능이 있는데 군주가 제재하지 않는 자는 승리한다. 예컨대 夏侯惇이 대장의 智略이 있자 曹操가 節度를 빌려주어서 편의에 따라 종사하게 한 것이 이것이다.

만약 장수가 재능이 없으면 군주가 반드시 만들어놓은 계책을 주어야 하니, 예컨대 後魏의 太武帝가 장수에게 명하여 출병할 적에 명령을 따르는 자는 승리하지 않음이 없었고 명령을 어긴 자는 대부분 군대를 훼손하였으며, 齊나라의 神武帝가 장수를 임용하여 적을 토벌할 적에 方略을 받들어 행하면 승리하지 않은 경우가 없고 지시와 가르침을 어기면 대부분 패망하였다. 이는 장수가 유능하지 못하고 군주가 유능한 경우이니, 또 어찌 통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此五者는 知勝之道也니라

이 다섯 가지는 승리를 아는 방도이다.

此五者는 皆知勝之道也라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승리를 아는 방도이다.


故로 曰 知彼知己면 百戰不殆하고

그러므로 병법에 이르기를 “적을 알고 자기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故로 曰 知彼之虛實하여 或可擊, 或不可擊하고 知己之强弱하여 或可擊, 或不可擊이면 雖與人百戰이나 而不致於危殆하나니 如司馬懿與諸葛孔明對壘에 終不與之戰1)하니 是는 能知彼知己者也라

1) 司馬懿……終不與之戰:司馬懿(179〜251)는 三國時代 魏나라의 名將이자 大臣으로, 晉나라를 건국한 世祖 司馬炎의 조부이다. 魏 明帝 靑龍 2년(234), 蜀漢의 승상 諸葛亮이 병사 10여만을 이끌고 북벌을 감행하자, 司馬懿가 魏軍을 이끌고 五丈原에서 이를 막았는데, 速戰速決을 원한 諸葛亮은 전면전으로 승부를 가리고자 하였으나, 司馬懿는 보루만 굳게 지킨 채 일절 應戰하지 않았다. 諸葛亮이 군중에서 病死하자, 蜀漢의 여러 장수들이 진영을 불태우고 퇴각하였는데도, 司馬懿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여 곧바로 추격하지 않았다. ≪晉書 권1 帝紀 宣帝≫

그러므로 이르기를 ‘적의 虛實을 알아서 혹은 공격할 수 있고 혹은 공격할 수 없음을 알며, 자기의 强弱을 알아서 혹은 공격할 수 있고 혹은 공격할 수 없음을 알면, 비록 남과 백 번 싸우더라도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는다.’ 한 것이다.

예컨대 司馬懿가 諸葛孔明과 보루를 마주하여 대치했을 적에 끝내 諸葛孔明과 싸우지 않았으니, 이는 적을 알고 자기를 안 자이다.


不知彼而知己면 一勝一負하고

적을 알지 못하고 자기만 알면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고,

不能知彼之虛實이로되 而能知自己勢力强弱이면 若與人戰에 或偶爾一勝하고 或偶爾一敗하나니 若王猛臨終에 謂苻堅曰 晉雖僻在一隅나 而正朔相承하고 謝安, 桓冲이 皆江表偉人이라 未易圖也라하더니 苻堅不聽其言하고 擧軍南伐하여 曰 吾士馬百萬이니 大江之險을 投鞭可濟라하고 遂有淝水之敗1)하니 是不知彼之實하고 而但知己之强也라

1) 王猛臨終……遂有淝水之敗:王猛(325〜375)은 五胡十六國時代 前秦의 名相으로 황제 苻堅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前秦을 당시에 가장 강대한 국가로 만든 인물이다.

王猛의 병이 위독해지자 苻堅이 몸소 문병을 가서 후사를 물으니, 王猛이 대답하기를 “晉나라가 비록 궁벽하고 누추한 吳․越 지방에 치우쳐 있다 할지라도 正朔을 이어받고, 군주가 어진 신하와 친근히 지내고 이웃 나라와 우호하며, 謝安과 桓冲이 모두 江東 지방의 훌륭한 사람이니, 쉽게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臣이 죽은 뒤에 晉나라를 도모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그러나 苻堅은 끝내 東晉을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였다. 이에 權翼 등 여러 신하들이 南征을 반대하였으나, 苻堅은 ‘우리 병사와 말이 백만이니, 채찍만 던져도 大江을 건널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남정을 감행하였다가 淝水의 싸움에서 대패하였다. ≪晉書 권114 苻堅≫

正朔은 年號를 이르는바, 당시 南朝와 北朝로 갈리었으나 천하가 모두 南朝인 東晉의 年號를 사용하고 있었다.

적의 虛實을 잘 알지 못하나 자기 세력의 强弱을 잘 알면, 만약 적과 싸울 적에 혹 우연히 한 번 승리하고 혹 우연히 한 번 진다.

예컨대 王猛이 죽을 적에 苻堅에게 이르기를 “晉나라가 비록 궁벽하게 한 귀퉁이에 있으나, 正朔이 서로 계승되고 謝安과 桓冲이 모두 江東 지방의 훌륭한 사람이니, 쉽게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런데 苻堅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군대를 일으켜 남쪽으로 정벌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병사와 말이 백만이니, 험한 大江(양자강)을 채찍만 던져도 건널 수 있다.” 하였는데 마침내 淝水에서 패전하였으니, 이는 적의 實함을 알지 못하고 다만 자기의 강성함만 안 것이다.


不知彼, 不知己면 每戰必敗라하니라

적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알지 못하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라고 한 것이다.

不知彼之虛實하고 又不知自己勢力之强弱이면 每與人戰에 必皆敗北라

적의 虛實을 알지 못하고 또 자기 세력의 强弱을 알지 못하면, 적과 싸울 때마다 반드시 모두 패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