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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爭 第七

제7편 군대의 전쟁


兩軍相對에 必爭하나니 爭者는 必以利而動이라 故로 篇中에 多以利言하니 利非貨利之利요 乃便利之利니 利於我則我勝하고 利於彼則彼勝이라 故로 不得不爭也니라

적과 우리 두 군대가 서로 대치하면 반드시 다투게 되니, 다투는 것은 반드시 이로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篇 가운데에 이로움을 가지고 많이 말하였으니, 이로움은 재물의 이로움이 아니요 바로 편리한 이로움이니, 우리에게 이로우면 우리가 이기고 적에게 이로우면 적이 이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孫子曰 凡用兵之法은 將受命於君하여 合軍聚衆하고 交和而舍에 莫難於軍爭이니라

孫子가 말하였다.

무릇 用兵하는 방법은 장수가 군주에게 명령을 받아 군대를 모으고 무리(병력)을 모아서 和門을 마주하여 머물(대치할) 적에는 軍爭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孫子言 凡用兵之法은 爲將者 受君命而征討에 合一國之軍하고 聚一國之衆하여 交對和門而止舍하면 事無有難於兩軍之爭利也라 軍門을 爲和門者는 言和於國하고 和於軍하고 和於陣하고 和於戰이니 然後에 可決勝也라

孫子가 말하였다.

무릇 用兵하는 방법은 장수 된 자가 군주의 명령을 받고 討伐할 적에 온 나라의 군대를 모으고 온 나라의 병력을 규합해서, 和門을 상대하여 주둔하면, 일이 두 군대가 이로움을 다투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없다.

軍門을 和門이라고 한 것은 나라에서 화합하고 군대에서 화합하고 진영에서 화합하고 전쟁에서 화합함을 말한 것이니, 그런 뒤에야 승부를 결단할 수 있는 것이다.


軍爭之難者는 以迂爲直하고 以患爲利니라

軍爭의 어려움은 굽은 것을 곧은 것으로 만들고 患亂을 이로움으로 만드는 것이다.

軍爭之所以爲難者는 蓋欲變迂遠爲直하고 轉患害爲利耳라

軍爭이 어려운 까닭은 굽고 먼 것을 변화하여 곧게 만들고, 환란과 해로움을 바꾸어 이로움으로 만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故로 迂其途而誘之以利하여 後人發하여 先人至니 此는 知迂直之計者也라

그러므로 그 길을 우회하여 이로움으로써 유인해서 적보다 뒤에 출발하여 적보다 먼저 도착하여야 하니, 이는 굽고 곧은 계책을 아는 자이다.

故로 迂遠其途而去하여 佯爲不知하고 復誘以小利하여 使敵貪하여 而不意我進이면 則我得以後人而發호되 先人而至니 此所謂能知以迂爲直, 以患爲利之計者也라 如趙奢救閼與할새 去國三十里而軍하여 留二十八日不行하고 復益增壘하니 是는 迂其途而誘之以利也요 卷甲而趨하여 一日一夜에 至閼與하여 據北山하니 是는 後發而先至也라

그러므로 그 길을 우회하여 멀리 떠나가서 거짓으로 모르는 체하고, 다시 작은 이로움으로써 적을 유인해서 적으로 하여금 이것을 탐하여 우리가 진출함을 예상하지 못하게 하면, 우리가 적보다 뒤늦게 출발하여도 적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으니, 이것은 이른바 ‘굽은 것을 곧음으로 삼고, 화를 이로움으로 삼는 계책을 안다.’는 것이다.

예컨대 趙奢가 閼與를 구원할 적에 國都에서 30리를 떠나 군대를 주둔하여 28일 동안 머무르며 행군하지 않고 다시 보루를 더욱 증축하였으니, 이는 그 도로를 우회하여 이익으로써 적을 유인한 것이요, 갑옷을 말아 행군하여 1晝夜 만에 閼與에 도착하여 北山을 점거하였으니, 이는 뒤늦게 출발하여 먼저 도착한 것이다.


故로 軍爭爲利요 衆爭爲危하니

그러므로 군대가 다툼은 자신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요, 무리를 동원하여 다툼은 위태로움이 되는 것이다.

故로 軍之所爭者1)는 欲以爲己之所利也니 若擧大衆而爭之면 反失利而爲危矣라 下文에 皆言衆爭爲危之事하니라 張預曰 智者爭之則爲利요 庸人爭之則爲危라하니 經文에 無智者庸人字하니 其說이 未知是否로라

1) 軍之所爭者:≪孫子髓≫에는 본문의 軍爭을 “九地의 다투는 땅이다.” 하였다. 그리고 본문의 ‘軍爭爲利 衆爭爲危’에 대하여 “王鳳洲의 ‘部伍를 따라 행군하면 나의 군대가 되니 이롭고, 部伍를 따라 행군하지 않으면 무리(무질서한 장군)가 될 뿐이다.’ 한 말이 위의 ‘勁先疲後’의 글에 들어맞고 또 ‘擧軍爭利’의 句와 중복되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므로 군대가 다투는 것은 자기의 이로움으로 만들고자 해서이니, 만약 대병력을 동원하여 다투면 도리어 이로움을 잃어 위태로움이 된다. 아랫글에는 모두 여러 무리를 동원하여 다투는 것이 위험한 일임을 말하였다.

張預는 말하기를 “지혜로운 자가 다투면 이로움이 되고 용렬한 자가 다투면 위태로움이 된다.” 하였는데, 經文에 智者와 庸人이란 글자가 없으니, 그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擧軍而爭利면 則不及하고 委軍而爭利면 則輜重捐이니라

군대를 동원하여 이로움을 다투면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고, 군대를 버리고 이익을 다투면 輜重을 버리게 된다.

擧全軍而與人爭利면 則行緩而不能及하나니 如苻堅以百萬衆으로 與晉爭하니 豈得所利哉아 委棄大軍而與人爭利면 則輜重皆棄捐矣니 如龐涓棄其步軍하고 率輕銳하여 倍日倂行하여 與齊爭而敗1) 是也라

1) 苻堅以百萬衆……與齊爭而敗:위의 두 사례는 앞에 여러 번 보인다.

온 군대를 동원하여 적과 이익을 다투면 행군이 느려 제때에 도착하지 못한다. 예컨대 苻堅이 백만의 대군을 가지고 晉나라와 다투었으니, 어찌 이로움을 얻을 수 있었겠는가.

대군을 버리고서 적과 이익을 다투면 輜重을 모두 버리게 되니, 예컨대 龐涓이 보병을 버리고 輕武裝한 정예병을 거느리고 하루에 이틀 동안 행군할 거리를 달려가서 齊나라와 다투다가 패한 것이 이것이다.


是故로 卷甲而趨하여 日夜不處하고 倍道兼行하여 百里而爭利면 則擒三將軍이요 勁者先하고 疲者後니 其法이 十一而至하고

이 때문에 갑옷을 말아서 급히 달려가서 밤낮으로 머물지 않고 행군속도를 배가하여 백 리에 이익을 다투면 세 장군이 사로잡히게 되고, 굳센 자가 먼저 도착하고 피로한 자가 뒤에 도착하게 되니, 그 법은 10분의 1만 도착한다.

以此之故로 卷甲而趨走하여 晝夜不休息하여 倍道兼行하여 百里之外에 與人爭利면 必爲敵擒吾三將軍이요 兵之勁捷者在先하고 疲倦者在後니 其法이 十分中에 一分先至하고 而九分未至也라 此以下는 言擧軍而爭利則不及者는 若秦與晉戰而三帥被擒1)이 是也라

1) 秦與晉戰而三帥被擒:세 장수는 秦나라의 孟明視․西乞術․白乙丙을 가리킨다. B.C. 627년 4월에 秦나라가 鄭나라를 치기 위하여 崤山으로 급히 출동하였다가, 晉軍의 역습을 받고 패하여 세 장수가 사로잡힌 일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僖公 33년≫

이 때문에 갑옷을 말아 <무장을 가볍게 하여> 급히 달려가서 밤낮으로 휴식하지 않고 행군속도를 배가하여 백 리 밖에서 적과 이익을 다투면 반드시 적에게 우리의 세 장군이 사로잡히게 되고, 병사 중에 굳세고 빠른 자가 앞에 있고 피곤한 자가 뒤에 있으니, 그 법이 10분 가운데 1분만 먼저 도착하고 9분은 아직 도착하지 못하게 된다.

이 이하는 온 군대가 이로움을 다투면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하였으니, 예컨대 秦나라가 晉나라와 싸우다가 세 장수가 사로잡힌 것이 이것이다.


五十里而爭利면 則蹶上將軍이니 其法이 半至하고

50리를 달려가 이익을 다투면 上將軍이 쓰러지니, 그 법이 군대가 반만 도착하고,

五十里外에 與人爭利면 則猶有顚蹶上將軍者하니 蓋其法이 吾軍十分中에 五分先至하고 而五分未至也라

50리 밖에서 적과 이익을 다투면 오히려 上將軍이 쓰러지는 경우가 있으니, 그 법은 우리 군대가 10분 가운데 5분만 먼저 도착하고 5분은 아직 도착하지 못한다.


三十里而爭利면 則三分之二至니라

30리를 달려가 이익을 다투면 군대의 3분에 2가 도착한다.

三十里外而與人爭利면 則吾軍三分中에 二分先至하고 一分未至也라 不言法者는 因上文也라

30리 밖에서 적과 이로움을 다투면 우리 군대가 3분 가운데 2분은 먼저 도착하고 1분은 아직 도착하지 못한다. 法을 말하지 않은 것은 위의 글을 이은 것이다.

○ 愚謂 孫子論擧軍爭利에 有損上將之失者하니 謂不可全軍而往이라 勁者在先하고 疲者在後면 力不齊而爲敵所乘也라 唐太宗이 征宋金剛할새 一日一夜에 行二百餘里하니 太宗不解甲三日이요 不食二日이로되 猶能取勝者1)는 何哉오 蓋是時에 金剛旣敗하여 衆心以沮하니 迫之則河東易平이요 緩之則別生他計라 故로 兵有形同而事異者하니 不可執一觀也니라

1) 唐太宗……猶能取勝者:宋金剛은 당시 河東 지방을 점령하고 있던 劉武周의 장수로, 이 사례는 唐 高祖의 武德 2년(620)에 있었는바, ≪資治通鑑≫ 권188 <唐紀 高祖神堯大聖孝皇帝>에 그대로 보인다.

○ 내가 생각하건대 孫子가 온 군대를 동원하여 이로움을 다툴 적에 上將軍을 손실함이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온 군대를 동원하여 달려가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 ‘굳세고 빠른 자가 앞에 있고 피곤한 자가 뒤에 있다.’는 것은, 힘이 고르지 못하여 적에게 습격을 당하는 것이다.

唐 太宗이 宋金剛을 정벌할 적에 1주야 만에 200여 리를 행군하니, 태종은 갑옷을 벗지 않은 지가 3일이었고 음식을 먹지 않은 지가 2일이었으나 오히려 승리했던 것은 어째서인가[ 이때에 宋金剛이 이미 패하여 병사들의 마음이 이미 沮喪되었으니, 이들을 압박하면 河東을 쉽게 평정할 수 있고 느슨히 내버려두면 다른 계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군대는 형체는 같으나 일이 다른 경우가 있으니, 한 가지만 고집하여 보아서는 안 된다.


是故로 軍無輜重則亡하고 無糧食則亡하고 無委積(자)則亡이니라

이 때문에 군대는 輜重이 없으면 망하고, 糧食이 없으면 망하고, 貯蓄이 없으면 망하는 것이다.

以此之故로 軍無衣甲器械면 則無以爲戰而覆亡矣요 無糧食餉軍이면 則飢餒疲困而覆亡矣요 無委積儲蓄이면 則轉輸不繼而覆亡矣니 此言委軍而爭利者라

이러한 이유로 군대는 의복과 갑옷과 기계(병기)가 없으면 싸울 수가 없어서 망하고, 병사들에게 먹일 양식이 없으면 굶주리고 피곤하여 망하고, 委積의 저축이 없으면 수송이 제대로 계속되지 못하여 망하니, 이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로움을 다투는 경우를 말한 것이다.

○ 愚按 委積二字를 張預, 杜牧은 皆爲貨財라하여 與儒家不同이라 史記世家云 孔子嘗爲委吏하사 而會計를 當이라하시고 詩云 有實其積1)라하니 則委積爲儲蓄이 明矣라 上云無糧食則亡은 是隨行之糧食也요 下文無委積則亡은 是無預備之儲蓄也라

1) 詩云 有實其積:≪詩經≫ <周頌 載芟>에 “수확하기를 많이도 하니 꽉 찬 그 露積이 萬이며 億이며 秭로다.[載穫濟濟 有實其積 萬億及秭]”라고 보인다. 積는 저축하는 것으로 음이 ‘자’이다.

○ 내가 살펴보건대 ‘委積’ 두 글자를 張預와 杜牧은 모두 貨財라 하여, 儒家와 해석이 똑같지 않다. ≪史記世家≫에 이르기를 “孔子께서 일찍이 委吏가 되어서 회계를 마땅하게 하셨다.” 하였고, ≪詩經≫ 에 이르기를 “그 저축이 충실하다.” 하였으니, 委積가 저축이 됨이 분명하다. 위에서 양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말했으니 이는 군대를 따르는 양식이고, 아랫글에 委積가 없으면 망한다고 말했으니 이것은 미리 대비한 저축이 없는 것이다.


故로 不知諸侯之謀者는 不能豫交하고

그러므로 제후들의 계책을 알지 못하는 자는 미리 外交하지 못하고,

豫는 與預通用이라 故로 爲將者 不知諸侯之謀면 不能預先與之交라

豫는 ‘預’자와 통용된다. 그러므로 장수 된 자가 제후들의 계책을 알지 못하면 미리 남과 외교하지 못하는 것이다.


不知山林險阻沮澤之形者는 不能行軍하고

山林과 險阻와 沮澤(저습한 늪지)의 지형을 알지 못하는 자는 행군하지 못하고,

不知山林險阻沮澤之形勢者는 不能行軍而與人爭利라 勢崇峻者 爲山이요 木叢聚者 爲林이요 坑坎者 爲險이요 一高一下者 爲阻요 泥濘漸洳者 爲沮요 衆水所歸不流者 爲澤이라

山林과 險阻와 沮澤의 형세를 모르는 자는 행군하여 남과 이익을 다투지 못하는 것이다. 지세가 높은 것이 山이 되고 나무가 빽빽이 모인 것이 林이 되며, 구덩이가 險이 되고 한 번 높고 한 번 낮은 것이 阻가 되며, 진흙이 있어서 축축한 땅이 沮가 되고 여러 물이 모여 흐르지 않는 것이 澤이 된다.


不用鄕導者는 不能得地利하나니

鄕導를 사용하지 않는 자는 지리를 얻지 못한다.

不用彼處鄕人引導者는 不能得彼處山川險阻道路迂直而處其地之利便也니 若吳伐魯에 (郕)[鄫]人導之하여 以克武城1)이 是也라

1) 吳伐魯……以克武城:鄫과 武城은 모두 魯나라 땅이다. 이 사례는 ≪春秋左氏傳≫ 哀公 8년에 있었던 일인데, 원문의 郕은 鄫의 誤記이므로 수정하였다.

저곳(敵地)의 고장 사람을 이용하여 길을 인도하지 않는 자는 저곳의 산천과 험조와 도로의 굽고 곧음을 알아 그 지역의 편리함에 대처하지 못하니, 예컨대 吳나라 사람이 魯나라를 정벌할 적에 郕 땅 사람이 길을 인도하여 武城을 이긴 것이 이것이다.


故로 兵은 以詐立하고 以利動하고 以分合爲變者也라

그러므로 군대는 속임수로 근본을 세우고, 이익에 따라 출동하고, 나누고 합하는 것을 변화로 삼는 것이다.

故로 兵은 以詭詐而立其根本하고 以因敵之利하여 動而取勝하여 以分而合, 合而分으로 爲變化之道니 詐者는 使敵莫測我虛實之形하여 而立我之本也라 利者는 見敵之虛하고 而動以乘其利也요 分合者는 或分或合하여 變奇爲正하고 變正爲奇하여 而因以制敵也라

그러므로 군대는 속임수로써 그 근본을 세우고, 적의 이로움에 따라 출동하여 승리를 쟁취하며, 군대를 나누었다가 모으고 모았다가 나누는 것으로 변화하는 방도를 삼는다.

속임수란 적으로 하여금 우리 허실의 형세를 측량하지 못하게 해서 우리의 근본을 세우는 것이요, 이로움이란 적의 허를 보고 출동하여 이로움을 쟁취하는 것이요, 나누고 합한다는 것은 병력을 혹 나누고 혹 모아서, 奇를 변화하여 正으로 삼고 正을 변화하여 奇로 삼음으로써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故로 其疾如風하며

그러므로 그 빠름이 바람과 같으며,

故로 敵當速乘之면 我軍疾行이 如飄風之迅急하여 掩其不備하여 使所向披靡니 若唐太宗追宋金剛1)이 是也라

1) 唐太宗追宋金剛:이 내용은 199쪽 ≪直解≫ 참조.

그러므로 적의 허점을 마땅히 신속히 타야 할 경우에는 우리 군대가 빨리 행군함이 회오리바람처럼 빨라서 저들이 대비하지 않은 곳을 습격하여 향하는 곳마다 적들이 쓰러지게 해야 하니, 唐 太宗이 宋金剛을 추격한 것과 같은 것이 이것이다.


其徐如林하며

그 느림이 숲과 같으며,

敵未有可乘之勢어든 宜徐而進하여 如林木之森森然이니 周征玁狁(험윤)에 師行盡舍而止1) 是也라

1) 周征玁狁(험윤) 師行盡舍而止:玁狁은 匈奴族의 옛 이름이고, 舍는 30里이다. 盡舍而止는 군대가 하루에 30里를 행군하고 유숙하는 것이다. ≪詩經≫ <小雅 六月>에 “玁狁이 매우 熾盛하여 내 이 때문에 급하게 여기니 왕이 이에 出征하여 王國을 바로잡으라 하시니라.……무더운 이 六月에 이미 내 戰服을 만들어 내 戰服이 이미 이루어지자 하루에 30리를 가니, 왕이 이에 出征하여 천자를 도우라 하시니라.[玁狁孔熾 我是用急 王于出征 以匡王國……維此六月 旣成我服 我服旣成 于三十里 王于出征 以佐天子]”라고 보인다.

적에게 탈 만한 형세가 있지 않으면 마땅히 서서히 나아가서 숲의 森森함과 같이 하여야 하니, 周나라가 玁狁을 정벌할 적에 군대의 행군을 하루에 30리를 다하고 중지한 것이 이것이다.


侵掠如火하며

적을 침략할 때에는 불꽃과 같이 하며,

侵掠敵境을 如猛火之勢니 成湯平昆吾夏桀하고 伐韋, 伐顧에 如火烈烈하여 莫我敢遏1)이 是也라

1) 成湯平昆吾夏桀……莫我敢遏:≪詩經≫ <商頌 長發>의 “武王이 깃발을 실으셔서 경건히 鈇鉞을 잡으시니 불이 烈烈히 타오르는 듯하여 나를 감히 막을 이가 없도다. 나쁜 잡초 한 뿌리에 세 싹이 났는데 악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하여 九有가 분명히 商나라로 돌아오거늘 韋와 顧를 이미 정벌하시고 昆吾와 夏桀을 치시도다.[武王載旆 有虔秉鉞 如火烈烈 盼莫我敢遏 苞有三蘖 莫遂莫達 九有有截 韋顧旣伐 昆吾夏桀]” 한 내용을 가리킨 것이다.

≪詩經集傳≫에 “武王은 湯王이다. 苞는 뿌리요 蘖은 옆에서 난 싹이니, 한 뿌리에 세 싹이 남을 말한 것으로 뿌리는 夏桀이요, 蘖은 韋․顧․昆吾이니 모두 桀의 무리이다.” 하였다. 九有는 九州이다.

적의 국경을 침략하기를 사나운 불꽃의 형세와 같이 하여야 하니, 成湯이 昆吾와 夏나라의 桀王을 평정하고 韋나라와 顧나라를 평정할 적에 맹렬한 불꽃과 같이 하여 감히 막을 수 없게 한 것이 이것이다.


不動如山하며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산과 같이 하며,

不動者는 持重也라 持重之時에 如山之不移니 趙奢救閼與에 去邯鄲三十里而止하여 堅壁留二十八日不行1)이 是也라

1) 趙奢救閼與……堅壁留二十八日不行:秦나라가 韓나라를 치기 위해 閼與로 진군해오자, 趙王은 趙奢를 將軍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趙奢가 성벽을 굳게 지키며 기회를 기다리다가 秦軍을 대파하고 閼與를 구원하였다. 자세한 과정과 戰術은 83쪽 주 1) 참조.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持重하는 것이다. 지중할 때에는 산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하니, 趙奢가 閼與를 구원할 적에 國都인 邯鄲을 떠나 30리 지점에서 멈추어 성벽을 굳게 지키고 28일 동안 머물러 행군하지 않은 것이 이것이다.

○ 愚按 張賁注本에 此句 在難知如陰之下, 動如雷震之上하니라

○ 내가 살펴보건대 張賁의 注本에는 이 문구가 ‘알기 어려움이 그늘과 같이 한다.[難知如陰]’의 아래에, ‘출동함이 천둥번개와 같이 한다.[動如雷震]’의 위에 있다.


難知如陰하며

<적으로 하여금 우리를> 알기 어려움이 그늘과 같이 하며,

我之虛實動靜을 使敵難知가 如陰雲蔽天하여 日月星辰을 莫得而覩니 馮異與王元行巡戰할새 異潛往栒邑하여 閉城偃旗鼓하니 行巡不知하고 馳赴之1) 是也라

1) 馮異與王元行巡戰……馳赴之:馮異([〜34)는 後漢 光武帝의 名將이다. 光武帝 建武 6년(A.D. 30) 여름에 光武帝가 隗囂를 정벌하기 위해 諸將을 보냈으나 隗囂에게 패하자, 隗囂는 승세를 타고 막하의 장수 王元과 行巡으로 하여금 병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隴西로 내려가게 하는 한편, 行巡의 軍을 나누어 보내 栒邑을 침공하게 하였다.

馮異가 즉시 달려가 이곳을 먼저 점령하려 하자, 諸將은 모두 반대하기를 “적의 군대가 강성한데다가 새로이 승세를 타고 있으니, 저들과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마땅히 형세가 편리한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켜 서서히 방략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였다. 馮異는 “적이 만약 栒邑을 점령하면 三輔 지방이 동요할 것이니, 이는 우리의 큰 걱정거리이다. 이제 먼저 栒邑으로 달려가서 城을 점령한 다음, 편안한 군대로 수고로운 적을 기다려야 한다.” 하고, 은밀히 栒邑으로 가서 깃발을 눕히고 북을 울리지 않았다.

行巡이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栒邑으로 달려오자, 馮異는 적이 예상치 못한 틈을 타 갑자기 북을 울리고 깃발을 세우면서 출격하니. 行巡의 병사들은 크게 놀라 어지러이 도망쳤다. 馮異는 수십 리를 추격하여 적을 대파하니, 이를 계기로 북쪽 지역의 여러 호걸들이 隗囂를 배반하고 光武帝에게 항복하였다. ≪後漢書 권17 馮異列傳≫

우리의 虛實과 動靜을 적으로 하여금 알기 어렵게 함이 짙은 그늘이 하늘을 가려서 해와 달과 별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馮異가 王元․行巡과 싸울 적에 은밀히 栒邑에 가서 성문을 닫고 깃발과 북을 눕히니, 行巡이 이것을 모르고 달려온 것이 이것이다.


動如雷震하며

출동할 때에는 천둥벼락과 같이 하며,

敵有可乘之勢어든 則動如雷霆之震擊하여 使彼不知所避니 如趙奢旣已遣秦間하고 乃卷甲而趨하여 一日一夜에 至閼與하여 發萬人하여 拒北山而勝秦이 是也라

적에게 탈 만한 형세가 있으면 출동하기를 천둥벼락이 급히 몰아치는 것과 같이 해서 적으로 하여금 피할 바를 모르게 하여야 하니, 예컨대 趙奢가 이미 秦나라의 간첩을 보낸 다음 곧바로 갑옷을 말아서 급히 달려가서 1주야 만에 閼與에 도착하고 병사 1만 명을 출동시켜 北山을 점거해서 秦나라를 이긴 것이 이것이다.


掠鄕分衆하며

鄕村을 노략질할 적에는 병력을 나누며,

掠取鄕野村落之糧이면 則當分衆而往이니 後篇에 掠於饒野면 三軍足食이 是也라

적의 시골과 촌락의 양식을 노략질하게 되면 마땅히 병력을 나누어 가야 하니, 뒤편의 ‘풍요로운 들판을 노략질하면 三軍의 양식이 풍족하다.’는 것이 이것이다.


廓地分利하며

넓은 지역에는 편리한 곳을 나누어 지키며,

空廓平易之地엔 當分兵守其便利하여 不使敵人得之라 或曰 開拓土地면 則分與有功者라하니 未知是否로라

공허하여 평탄한 지역에서는 마땅히 병력을 나누어 편리한 곳을 지켜서 적으로 하여금 차지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적의 땅을 빼앗아> 토지를 개척했으면 공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라고 하니, 옳은지 모르겠다.


懸權而動하여

저울대를 매달아놓고 거동(출동)하여,

如懸稱錘(추)於衡之上하여 稱量敵勢之輕重虛實然後에 擧動也라

마치 저울추를 저울대 위에 매달아놓듯이 하여, 적의 형세의 輕重과 虛實을 저울질한 뒤에 거동하는 것이다.


先知迂直之計者 勝하나니 此는 軍爭之法也니라

먼저 굽고 곧은 계책을 아는 자는 승리하니, 이것이 軍爭의 법이다.

先知以迂爲直, 以直爲迂之計者 勝이니 此所謂軍爭之法也라

굽은 것을 곧음으로 삼고 곧은 것을 굽음으로 삼는 계책을 미리 아는 자가 승리하니, 이것이 이른바 ‘軍爭의 법’이라는 것이다.


軍政曰 言不相聞故로 爲之金鼓하고 視不相見故로 爲之旌旗라하니 夫金鼓旌旗者는 所以一人之耳目也라

軍政에 이르기를 “말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기 때문에 징과 북을 사용하고, 시력이 서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깃발을 사용한다.” 하였으니, 징과 북과 깃발은 사람의 귀와 눈을 통일시키는 것이다.

軍政有云 兵多地廣하면 言不能相聞也라 故로 爲金鼓之聲하여 使三軍聞之而進止하고 視不能相見也라 故로 爲旌旗之形하여 使三軍視之而開合이라하니 夫金鼓旌旗四者는 所以齊一衆人之耳目也라

軍政에 이르기를 “병력이 많고 땅이 넓으면 말소리가 서로 들리지 않으므로 징과 북의 소리를 내어서 三軍으로 하여금 이것을 듣고 전진하고 멈추게 하며, 시력이 서로 보이지 않으므로 깃발의 형상을 만들어서 삼군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고 분산하고 모이게 한다.” 하였으니, 징과 북, 旌과 깃발 이 네 가지는 여러 사람의 귀와 눈을 통일시키는 것이다.


人旣專一이면 則勇者不得獨進하고 怯者不得獨退하나니 此는 用衆之法也니라

사람이 이미 통일되면 용감한 자가 홀로 전진할 수 없고 겁이 많은 자가 홀로 후퇴할 수 없으니, 이것은 많은 병력을 운용하는 방법이다.

衆人耳目이 旣專一이면 則勇銳者不得獨自前進하고 怯弱者不得獨自後退하니 此所謂用衆之法也라 吳起與秦戰할새 有一材士不勝其勇하여 前獲雙首어늘 吳起以非吾之號令이라하여 乃斬之하니 此는 勇者 不得獨進也라 蓋士卒의 專心一意가 惟在金鼓旌旗之號하여 當進皆進하고 當退皆退하며 當左皆左하고 當右皆右하면 人力齊而易爲勝耳라

여러 사람의 귀와 눈이 이미 통일되면 용감한 자가 홀로 전진하여 싸울 수 없고 겁이 많고 약한 자가 홀로 후퇴할 수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많은 병력을 사용하는 방법이다.’라는 것이다.

吳起가 秦나라와 싸울 적에 한 명의 재주가 뛰어난 병사가 자신의 용맹을 이기지 못하고 전진하여 적의 두 수급을 가져오자, 吳起는 ‘내가 호령한 것이 아니다.’ 하여 마침내 그를 목 베었으니, 이는 용감한 자가 홀로 전진할 수 없는 것이다.

병사들의 마음이 통일되고 생각이 전일한 것은 오직 징과 북, 깃발의 신호에 달려있어서 마땅히 전진해야 할 경우에는 모두 전진하고 마땅히 후퇴해야 할 경우에는 모두 후퇴하며, 마땅히 왼쪽으로 가야 할 경우에는 모두 왼쪽으로 가고 마땅히 오른쪽으로 가야 할 경우에는 마땅히 오른쪽으로 가야 하니, 이렇게 하면 사람(병사)의 힘이 통일되어서 승리하기가 쉬운 것이다.


故로 夜戰에 多火鼓하고 晝戰에 多旌旗는 所以變人之耳目也니라

그러므로 야간 전투에는 불과 북을 많이 사용하고 주간 전투에는 깃발을 많이 사용하니, 이는 사람의 귀와 눈을 변하게 하는 것이다.

故로 與敵人遇夜而戰이면 則多用火鼓하고 遇晝而戰이면 多用旌旗하니 鼓는 所以變亂敵人之耳요 火與旌旗는 所以變亂敵人之目이라 昔에 越與吳夾水相拒할새 越爲左右句卒하여 夜爭鳴鼓而進이어늘 吳分兵禦之러니 越遂潛涉水하여 當中軍하여 襲破吳兵1)하고 陸遜攻費棧할새 益施牙幢하고 分布鼓角이라가 夜潛山谷間하여 鼓譟而前하여 應時破散2)하고 趙宋時에 張齊賢守代러니 契丹兵이 薄3)城下어늘 齊賢이 中夜遣兵하여 由城南하여 持幟燃炬하니 虜見하고 謂幷師至라하여 駭而北走어늘 齊賢伏兵이라가 掩擊大破之4)하니 是는 變亂以火鼓也라 後漢臧宮이 攻延岑할새 多張旗幟하고 登山鼓譟하여 右步左騎 夾船而引呼하니 聲動山谷이라 岑望之震恐이어늘 宮因從擊大破之5)하고 春秋時에 晉伐齊할새 使司馬로 斥山澤之險하여 雖所不至라도 必旆而疎陳之한대 齊侯畏而脫歸6)하니 是는 變亂以旌旗也라

1) 越與吳夾水相拒……襲破吳兵:B.C. 478년 3월에 越王 句踐이 吳나라를 치자, 吳王 夫差가 笠澤에서 강물을 끼고 대치하였다. 이때 越王이 좌우로 句卒陣을 설치하여 어지러이 북을 치며 진격하니, 吳軍이 부대를 나누어 이를 방어하였다. 越王이 三軍을 이끌고 은밀히 강을 건너 吳나라의 中軍 앞으로 바짝 다가가 갑자기 북을 울리며 공격하니, 吳軍은 큰 혼란에 빠져 대패하였다. 句卒은 군대가 虛張聲勢하기 위해 임시로 만드는 진영을 말한다. ≪春秋左氏傳 哀公 17년≫

2) 陸遜攻費棧……應時破散:吳나라의 장수 陸遜이 右部督으로 있을 때, 丹楊을 근거로 한 도적의 괴수 費棧이 曹操의 印綬를 받고 오랑캐를 선동하여 曹操와 내응하려고 하였다. 孫權이 陸遜을 보내어 費棧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병력이 많지 않았다. 이에 陸遜은 牙旗의 숫자를 더욱 늘리고 북과 나팔을 고르게 배치한 다음, 한밤중에 부대를 산골짝 사이로 잠입시켰다가 갑자기 북과 나팔을 울리며 진격하여 일거에 도적들을 소탕하였다. ≪三國志 권58 陸遜傳≫

3) 薄:迫(압박하다)과 같다.

4) 趙宋時……掩擊大破之:趙宋은 趙匡胤이 일으킨 北宋이며, 張齊賢(942〜1014)은 北宋 초기의 名將으로 眞宗 때 승상을 지냈다. 張齊賢이 代州의 知事로 있을 적에 遼나라(契丹) 군대가 城 아래로 육박해 오자, 張齊賢은 한밤중에 200명의 병사를 징발하여 각각 旗幟 한 개씩과 건초 한 묶음씩을 가지고 州城의 서남쪽 30리 지점으로 가서 旗幟를 배열하고 건초를 불태우게 하고, 반대편에 보병 2천 명을 미리 매복시켰다. 遼軍은 멀리서 火光 가운데 旗幟가 있는 것을 보고는 宋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놀라서 북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매복했던 군대가 遼軍을 기습하여 대패시켰다. ≪宋史 권265 張齊賢列傳≫

5) 臧宮攻延岑……宮因從擊大破之:臧宮([〜A.D. 58)은 後漢 光武帝의 장수이며, 延岑은 당시 蜀 지방을 점거하고 있던 군벌 公孫述의 장수이다. 光武帝 建武 11년(A.D. 35)에 臧宮이 沅水에 진을 치고 있는 延岑을 공격하였는데, 새벽에 수많은 旗幟를 늘어세우고 산에 올라가 요란하게 북을 치며 오른쪽에는 步兵, 왼쪽에는 騎兵을 배열하여 함성을 지르니, 소리가 온 산골짝을 진동하였다. 延岑은 漢軍이 뜻밖에 갑자기 들이닥치자, 크게 두려워하고 어찌할 바를 몰랐다. 臧宮이 이 틈을 타 공격을 가하여 대파하니, 延岑은 成都로 달아나고 그의 무리들은 모두 항복하였다. ≪資治通鑑 권42 漢紀 世祖光武皇帝≫

6) 晉伐齊……齊侯畏而脫歸:B.C. 555년 10월에 晉나라가 齊나라를 정벌할 적에 司馬로 하여금 山澤의 험한 곳을 정탐하여 비록 군대가 갈 수 없는 곳이라도 반드시 깃발을 듬성듬성 세워 陣營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고, 兵車에는 왼쪽에만 사람을 태우고 오른쪽에는 허수아비를 태우고서 기치를 앞세워 달리게 하고, 수레에는 섶을 매달아 끌고 가게 해서 먼지를 일으키도록 하였다. 齊侯가 巫山에 올라 晉軍을 조망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晉軍의 숫자가 많다고 생각하여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다. ≪春秋左氏傳 襄公 18년≫

그러므로 적과 夜間에 만나 싸우게 되면 불과 북을 많이 사용하고 晝間에 만나 싸우게 되면 깃발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니, 북은 적의 귀를 변란시키는 것이요 불과 깃발은 적의 눈을 변란시키는 것이다.

옛날 越나라 군대가 吳나라 군대와 물을 끼고 서로 대치해 있을 적에 월나라가 좌․우로 句卒을 만들어서 밤에 다투어 북을 울리고 진격하자 오나라 군대가 병력을 나누어 막았는데, 월나라 군대가 마침내 은밀히 물을 건너가서 오나라 중군을 향하여 기습해서 격파하였다. 陸遜이 費棧을 공격할 적에 牙幢을 더욱 많이 설치하고 북소리와 나팔소리를 널리 일어나게 하다가 밤중에 은밀히 산골짜기로 출동해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전진하여 제때에 적을 공격해서 해산시켰다. 그리고 趙宋 때에 張齊賢이 代 지방을 수비하고 있었는데 契丹의 군대가 城 밑으로 쳐들어오자, 장제현은 한밤중에 병력을 파견하여 성의 남쪽에서 깃발을 잡고 횃불을 들게 하니, 오랑캐들은 이것을 보고 모두 구원병이 온 것으로 생각하여 놀라서 북쪽으로 달아나므로, 장제현이 군대를 매복시켰다가 습격하여 대파하였으니, 이는 불과 북으로써 적의 귀와 눈을 변란시킨 것이다.

後漢 때 臧宮이 延岑을 공격할 적에 깃발을 많이 펼쳐놓고 산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면서, 오른쪽에는 보병을, 왼쪽에는 기병을 배치하여 배를 끼고 나아가며 함성을 지르니, 소리가 온 산골짝을 진동하였다. 延岑이 이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자, 臧宮이 이 틈을 타 공격하여 대파하였으며, 춘추시대에 晉나라가 齊나라를 정벌할 적에 司馬로 하여금 山澤의 험한 곳을 개척하여 비록 사람이 가지 않는 곳이라도 반드시 깃발을 듬성듬성 진열하자, 齊나라 임금이 두려워하여 몸만 빠져 돌아갔으니, 이는 깃발로써 적의 눈을 변란시킨 것이다.


故로 三軍은 可奪氣요 將軍은 可奪心이니라

그러므로 三軍은 氣를 빼앗을 수 있고, 장군은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三軍之衆을 吾可以奪其氣요 三軍之將을 吾可以奪其心이니 氣者는 三軍之衆이 所恃而戰也어늘 彼旣奪其氣면 豈能與我戰이리오 心者는 三軍之將이 所主而謀也어늘 彼旣奪其心이면 豈能爲之謀리오

三軍의 무리를 우리가 그 기운을 빼앗을 수 있고 삼군의 장수를 우리가 그 마음을 빼앗을 수 있으니, 기운이란 삼군의 무리가 믿고서 싸우는 것인데, 저들이 이미 그 기운을 빼앗겼다면 어찌 우리와 대적하여 싸우며, 마음이란 삼군의 장수가 주장하여 도모하는 것인데, 저들이 이미 그 마음을 빼앗겼다면 어찌 도모를 할 수 있겠는가.

○ 春秋時에 魯與齊戰할새 齊人三鼓에 而曹劌(귀)方鼓之하니 齊師敗績이라 劌曰 戰은 勇氣也라 一鼓作氣하고 再而衰하고 三而竭하나니 彼氣竭하고 我氣盈이라 故로 克之1)라하니 此는 陳久人倦而奪其氣者也라 寇恂이 令士卒乘城하여 鼓譟大呼하여 佯言曰 劉公兵到라하니 蘇茂軍聞之하고 陳動이어늘 恂因奔擊大破之2)하니 此는 誑以聲勢而奪其氣者也라 張遼守合淝할새 孫權이 將十萬衆攻之어늘 遼選士得八百人하여 被甲持戟하고 先登陷陣하여 殺數十人하고 斬二將하고 自旦戰하여 至日中昃하니 吳人奪氣어늘 還修守備한대 衆心乃安3)하니 此는 以勇戰而奪其氣者也라 宇文憲이 阻水爲陳하여 以拒齊領軍段暢할새 暢曰 觀公言語하니 不是凡人이로다 憲曰 我는 齊王也라하고 徧指陳王純已下하여 竝以告之한대 暢鞭馬去4)하니 此는 以名位而奪其心者也라 薛仁貴領兵하여 擊突厥元珍於雲州할새 突厥問曰 唐將爲誰오 曰 薛仁貴로라 突厥曰 吾聞薛將軍이 流象州死矣라하니 安得復生이리오 仁貴脫兜鍪(두무)見之한대 突厥相視失色하여 下馬羅拜하고 稍稍遁去어늘 仁貴因進擊大破之5)하니 此는 示以形貌而奪其心者也라 然이나 必能守吾之氣하여 使銳盛而不衰然後에 可以奪彼之氣也요 能養吾之心하여 使閑靜而不亂然後에 可以奪彼之心也라 氣奪則怯於鬪하고 心奪則亂於謀하여 下者不能鬪하고 上者不能謀하여 上下怯亂이면 則吾一擧而乘之矣니라

1) 魯與齊戰……克之:B.C. 684년 봄에 齊軍이 魯나라를 공격하였다. 魯 莊公이 曹劌와 같은 수레를 타고 長勺에서 齊軍과 전투하였는데, 莊公이 북을 치려 하자 曹劌는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렸다. 齊軍이 북을 세 번 치자, 曹劌는 이제 때가 되었다고 하였다. 齊軍이 크게 패하자, 莊公이 추격하려고 하였으나, 曹劌가 아직 추격하면 안 된다고 말리고는 수레에서 내려서 齊軍의 수레바퀴 자국과 齊軍이 후퇴하는 모습을 살펴본 뒤에 이제는 추격해도 괜찮다고 하였다. 이에 莊公이 齊軍의 뒤를 추격하였다.

齊軍을 이긴 뒤에 莊公이 曹劌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曹劌는 “전쟁의 승패는 용기에 달려있습니다. 북이 한 번 울리면 용기가 진작되고, 두 번 울리면 용기가 쇠하고, 세 번 울리면 용기가 고갈됩니다. 齊軍이 북을 세 번 울렸을 때 저들은 이미 용기가 고갈되고 아군은 한창 용기가 왕성하였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大國은 그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워서 복병을 배치했을 염려가 있기 때문에 제가 수레에서 내려 齊軍의 수레바퀴 자국을 살핀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수레바퀴 자국이 어지러웠고, 그들의 깃발을 바라보니 깃발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래서 추격했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莊公 10년≫

2) 寇恂……恂因奔擊大破之:寇恂([〜A.D. 36)은 後漢 光武帝 때의 名將이다. 更始帝의 장수인 朱鮪가 光武帝가 북방으로 출정하여 河內 지역의 군사적 대비가 소홀하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인 討難將軍 蘇茂와 副將 賈彊으로 하여금 병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鞏河를 건너 溫邑을 공격하게 하였다. 당시 寇恂은 光武帝에게 발탁되어 河內를 지키며 병참의 구실을 맡고 있었는데, 적이 공격한다는 檄文이 이르자, 寇恂은 즉시 군대를 정돈하여 溫邑으로 달려가는 한편, 소속 고을에 병사를 징발하여 溫邑으로 보내도록 지시하였다.

이때 軍吏들은 모두 간하기를 “大軍이 다 모일 때를 기다려서 출동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나, 寇恂은 “溫邑은 郡의 울타리이다. 溫邑을 잃으면 郡을 지킬 수가 없게 된다.” 하고는, 마침내 달려가 아침나절부터 교전하였다. 이때 偏將軍 馮異가 구원병을 보내고 여러 고을의 병력이 때맞추어 이르러 兵馬가 사방에서 모이고 旗幟가 온 들판을 뒤덮었다. 寇恂은 장병들에게 城으로 기어오르며 “劉公(光武帝)의 군대가 도착했다.”고 큰소리로 외치게 하였다. 蘇茂 軍이 이 소리를 듣고 동요하니, 寇恂이 이틈을 타 공격하여 적을 大破하고 추격하여 마침내 賈彊을 참수하였다. ≪後漢書 권17 寇恂列傳≫

3) 張遼守合淝……衆心乃安:赤壁大戰에서 대패한 曹操가 許昌으로 돌아가고 난 뒤, 張遼․樂進․李典 등이 불과 7천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合淝에서 孫權의 10만 대군과 싸워, 張遼의 불같은 용맹을 앞세워 끝내 승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164쪽 주 2) 참조.

4) 宇文憲……暢鞭馬去:宇文憲(544~578)은 南北朝時代 北周의 장군으로 武帝(宇文邕)의 아우이다. 北周 武帝 建德 5년(576)에 武帝가 北齊를 치려고 晉州에 주둔하였는데, 그의 아우 宇文憲이 후방의 공격을 맡고 있었다. 이때 北齊 軍이 추격하여 高梁橋에 이르니, 宇文憲이 정예기병 2천으로 강을 막고 진을 쳤다. 齊나라의 領軍인 段暢이 곧장 진격하여 高量橋에 이르자, 宇文憲이 강물을 사이에 두고 段暢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宇文憲이 段暢에게 성명을 묻자, 段暢이 답하고 다시 상대가 누군지를 물었다. 宇文憲이 “나는 虞侯 大都督일 뿐이오.”라고 하자, 段暢이 “公의 말소리를 들어보니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소. 오늘 우리가 서로 만났으니, 이름과 지위를 숨겨서 무엇하겠소.” 하였다. 宇文憲이 “나는 天子의 아우인 齊王이오.”라고 대답하며, 부하인 陳王 宇文純 등을 두루 소개하니, 段暢이 겁을 먹고 말을 채찍질하여 가버렸다. ≪周書 권12 齊煬王憲≫

5) 薛仁貴領兵……仁貴因進擊大破之:이 내용은 ≪新唐書≫ 권111 <薛仁貴列傳>에 그대로 보인다. 薛仁貴(614〜683)는 唐 太宗, 高宗 때의 名將으로 高句麗 침공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 春秋時代에 魯나라가 齊나라와 싸울 적에 제나라 사람이 세 번 북을 치자 曹劌가 비로소 북을 치며 진격하니, 제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이에 대해 조귀는 그 이유를 말하기를 “싸움은 용기로 싸우는 것입니다. 첫 번째 북을 칠 때에는 기운이 일어나고 두 번째 북을 칠 때에는 기운이 쇠하고 세 번째 북을 칠 때에는 기운이 고갈되니, 저들은 기운이 고갈되고 우리는 기운이 충만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하였으니, 이는 陣을 친 지가 오래되어 사람들이 지쳐서 그 기운을 빼앗긴 것이다.

寇恂은 병사들로 하여금 성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크게 고함치며, 거짓으로 말하기를 “劉公(劉秀)의 군대가 도착한다.” 하니, 蘇茂의 군대가 이 말을 듣고 대열이 동요하자, 구순이 그 틈을 타 크게 공격하여 대파하였으니, 이는 위풍과 기세로써 속여서 적의 기운을 빼앗은 것이다.

張遼가 合淝를 지킬 적에 孫權이 10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자, 張遼는 정예병 800명을 선발하여 갑옷을 입히고 창을 잡게 하여, 먼저 성에 올라가 적진을 무찌르게 해서 수십 명을 죽이고 두 명의 장수를 목 베었으며, 아침부터 해 질 무렵까지 싸우니, 吳나라 병사들이 기운을 빼앗기므로 다시 돌아와 수비를 견고히 해서 병사들의 마음이 편안해졌으니, 이는 용맹으로 싸워서 적의 기운을 빼앗은 것이다.

宇文憲이 강물을 막고 사이에 두고 진을 쳐서 齊나라의 領軍인 段暢을 막을 적에, 단창이 말하기를 “그대의 말소리를 들어보니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우문헌이 말하기를 “나는 齊王이다.” 하고 陳王 純 이하 여러 사람들을 두루 가리키며 모두 이름을 말해주자 단창이 말을 채찍질하여 도망갔으니, 이는 명성과 지위를 가지고 적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다.

薛仁貴가 병력을 이끌고 突厥의 元珍을 雲州에서 공격할 적에 돌궐이 “당나라 장수가 누구인가[” 하고 물으니, 설인귀가 대답하기를 “나 설인귀이다.”라고 하였다. 돌궐이 말하기를 “내 듣건대 薛將軍은 象州로 유배 가서 죽었다 하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 여기에 올 수가 있는가[” 하니, 설인귀가 투구를 벗어 얼굴을 보이자 突厥들이 서로 보고 얼굴이 흙빛이 되어서 말에서 내려 절하고 차츰차츰 도망해가므로 설인귀가 진격하여 대파하였으니, 이는 형상과 모형을 보여주어서 적의 마음을 빼앗은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자신의 기운을 지켜서 기운이 성하게 하고 쇠하지 않게 한 뒤에야 적의 기운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요, 자신의 마음을 잘 길러서 한가하고 여유로워 어지럽지 않게 한 뒤에야 적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적이 기운을 빼앗기면 싸움에 겁을 내고 마음을 빼앗기면 계책이 혼란하여, 아래에 있는 자는 싸우지 못하고 위에 있는 자는 도모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上下가 겁을 내고 혼란하면 우리가 일거에 틈을 타서 공격할 수 있는 것이다.


是故로 朝氣는 銳하고 晝氣는 惰하고 暮氣는 歸라 故로 善用兵者는 避其銳氣하고 擊其惰歸하나니 此는 治氣者也라

이 때문에 아침 기운은 예리하고 낮 기운은 태만하고 저녁 기운은 지쳐서 돌아가려 한다. 그러므로 용병을 잘하는 자는 그 예리한 기운을 피하고 나태하여 돌아갈 때에 공격하는 것이니, 이는 기운을 잘 다스리는 자이다.

是故로 敵人早朝初至에 其氣必盛이라가 陳兵至中午면 則人力困倦하여 而氣亦怠惰하고 待至日暮면 人心思歸하여 其氣益衰하나니 善能用兵者는 敵之氣銳면 則避之하고 敵氣惰歸면 則擊之하니 此는 所以謂善治己之氣而奪人之氣者也라 夫氣者는 三軍之所恃而戰者也니 我之氣盛이면 則可以勝敵이요 彼之氣衰면 則爲我所勝이니 敵人初來에 新氣必盛이어든 我且避之요 又當治我之氣하여 而不使少衰하고 待敵氣之惰歸而擊之면 則無往而不勝矣라

이 때문에 적이 이른 아침에 왔을 때에는 그 기운이 반드시 성하다가 병력을 진열하여 점심때에 이르면 병사들이 피곤하고 기운 또한 게을러지며, 해 질 무렵에 이르면 병사들의 마음이 돌아가고 싶어 하여 그 기운이 더욱 쇠해지는 것이다.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적의 기운이 예리하면 피하고, 적의 기운이 게으르고 돌아가려 하면 공격하니, 이것을 일러 자신의 기운을 잘 다스려서 남의 기운을 빼앗는다고 하는 것이다.

기운이란 三軍이 믿고서 싸우는 것이니, 우리의 기운이 성하면 적을 이길 수 있고 적의 기운이 쇠하면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준다. 적이 처음 왔을 때에 새로운 기운이 반드시 성할 것이니 그러면 우리는 우선 피하고, 또 마땅히 우리의 기운을 다스려서 조금도 쇠하지 않게 하여, 적의 기운이 게을러지고 돌아가려 할 때를 기다렸다가 공격하면 가는 곳마다 승리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若唐太宗이 與竇建德으로 戰於汜(사)水東할새 建德이 列陳數里어늘 太宗謂諸將曰 賊逼城而陳하여 有輕我心하니 當按兵不出하고 待敵氣衰하여 陳久卒飢하면 必將自退하리니 退而擊之면 何往不克이리오 建德列陳하여 自卯至午하니 兵士飢倦列坐하고 又爭飮水어늘 太宗曰 可擊矣라하고 遂勒兵與戰하여 生擒建德1)하니라 司馬法曰 新氣勝2)이라하니 是亦朝氣銳之義라

1) 唐太宗……生擒建德:竇建德은 隋나라 말기 혼란기에 봉기하여 夏王을 칭한 軍閥이다. 이 내용은 621년에 있었던 일로 ≪舊唐書≫ <太宗本紀>에 그대로 보인다.

2) 司馬法曰 新氣勝:≪司馬法≫ <嚴威>에 “모든 전투는 강한 체력으로써 지구전을 할 수 있고, 높은 사기로써 승리할 수 있고, 견고한 수비로써 오래 버틸 수 있고, 위기에 처해서 분발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 본심이 안정되어야 견고히 수비할 수 있고, 새로운 기운이 충만해야 이길 수 있다. 또한 좋은 갑옷과 장비로써 수비를 견고히 할 수 있고, 우수한 병기로써 승리할 수 있다.[凡戰 以力久 以氣勝 以固久 以危勝 本心固 新氣勝 以甲固 以兵勝]”라고 보인다.

예컨대 唐 太宗이 竇建德과 汜水의 동쪽에서 싸울 적에 두건덕이 몇 리에 걸쳐 길게 진영을 나열하자, 태종이 여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적이 우리의 성에 가까이 진영을 쳐서 우리를 얕보는 마음이 있으니, 우리는 마땅히 군대를 멈추어 출동하지 말고 적의 기운이 쇠하기를 기다렸다가, 적이 陣을 친 지가 오래되어 병사들이 굶주리면 반드시 장차 스스로 물러갈 것이니, 물러갈 때에 공격하면 어디에 간들 이기지 못하겠는가[” 하였다.

두건덕이 진영을 나열하여 卯時(5~7시)로부터 午時(11~13시)에 이르니, 병사들이 굶주리고 지쳐서 늘어앉고 또 다투어 물을 마셨다. 태종은 이르기를 “지금은 공격할 만하다.” 하고는, 마침내 병사들을 무장하여 적군과 싸워서 竇建德을 사로잡았다.

≪司馬法≫에 이르기를 “새로운 기운이 충만해야 이긴다.” 하였으니, 이 또한 아침 기운은 예리하다는 뜻이다.


以治待亂하고 以靜待譁니 此는 治心者也요

自軍의 다스려짐으로써 적이 혼란하기를 기다리고, 自軍의 고요함으로써 적이 떠들기를 기다려야 하니, 이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요,

以己之治로 待敵之亂하고 以己之靜으로 待敵之譁니 此은 善能治己之心而奪敵人之心者也라 心者는 一身之主니 安則治하고 定則靜이니 若以事撓惑之면 則亂且譁矣라 自主將으로 至士卒히 莫不皆要治其心也니 若謝玄待苻堅退軍而亂하여 擊敗之1)하니 是는 以治待亂也요 張遼靜坐中軍而誅反者2)하니 是는 以靜待譁也라 司馬法曰 本心固라하니 此亦治心之義라

1) 謝玄待苻堅退軍而亂 擊敗之:383년에 前秦의 苻堅이 직접 백만 대군을 이끌고 東晉을 침략하자, 東晉의 장수 謝玄이 淝水에서 방어하여 대승을 거둔 사례이다. 자세한 과정과 戰術은 88쪽 주 1)과 183쪽 아래 단락 주 1) 참조.

2) 張遼靜坐中軍而誅反者:曹操가 荊州를 도모하기 전에 張遼를 長社로 파견하였는데, 출발에 앞서 軍中에 반란을 도모하는 자가 있어 밤에 시끄럽게 떠들며 불이 나니, 전군이 동요되어 혼란에 빠졌다. 張遼는 좌우의 측근들에게 이르기를 “동요하지 말라. 이것은 진영이 모두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고 필시 변고를 일으키는 자들이 있어 사람들을 동요시키려 하는 것이다.” 하고, 軍中에 명령하여 반역에 참가하지 않은 자들을 편안히 있게 하였다. 그리고 張遼는 친위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진영 가운데에 앉아있었는데, 얼마 후 소란이 진정되고, 주모자를 잡아 죽였다. ≪三國志 권17 張遼傳≫

자군의 다스려짐으로써 적이 혼란하기를 기다리고 자군의 고요함으로써 적이 떠들기를 기다려야 하니, 이는 자군의 마음을 잘 다스려서 적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다. 마음이란 한 몸의 주장인바, 편안하면 다스려지고 안정되면 고요하니, 만일 일로써 흔들고 미혹하게 하면 어지럽고 또 시끄럽게 떠들게 된다.

主將으로부터 병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니, 예컨대 謝玄이 苻堅이 군대를 후퇴시키다가 혼란하기를 기다려서 격파하였으니, 이는 자군의 다스려짐으로써 적이 혼란하기를 기다린 것이요, 張遼가 고요히 중군에 앉아 배반한 자를 목 베었으니, 이는 자기의 고요함으로써 적이 시끄럽게 떠들기를 기다린 것이다.

≪司馬法≫에 이르기를 “본심이 안정되어야 견고히 수비한다.” 하였으니, 이 또한 마음을 다스리는 뜻이다.


以近待遠하고 以佚待勞하고 以飽待飢니 此는 治力者也라

가까이 있는 自軍으로 멀리서 온 적을 기다리고, 편안히 있는 自軍으로 수고로운 적을 기다리고, 배부른 自軍으로 굶주린 적을 기다려야 하니, 이는 힘을 다스리는 것이다.

以己之近으로 待敵之遠來者하고 以己之佚로 待敵之勞倦者하고 以己之飽로 待敵之飢餓者니 此는 治己之力而困敵人之力者也라 夫力者는 三軍之所恃而鬪者也니 近佚飽則力盛强하고 遠勞飢則力疲倦하나니 以盛强而擊疲倦은 此治力之法也라

자군의 가까움으로써 적이 멀리서 오기를 기다리고, 자군의 편안함으로써 적이 수고롭고 피곤하기를 기다리고, 자군의 배부름으로써 적이 굶주림을 기다리니, 이는 자군의 힘을 잘 다스려서 적의 힘을 곤궁하게 하는 것이다.

힘은 三軍이 믿고서 싸우는 것인데, 가깝고 편안하고 배부르면 힘이 성하고 강해지며, 멀고 수고롭고 굶주리면 힘이 지치고 피곤하게 되니, 성하고 강함으로써 지치고 피곤한 적을 공격함은 힘을 다스리는 법이다.

吳起曰 敵人이 遠來新至하여 行列未定이면 可擊1)이라하니 此는 以近待遠者也요 晉周訪討杜曾할새 使將軍李常督左甄하고 許朝督右甄하고 訪領中軍하여 高張旗幟하고 自於陣後에 射雉以安衆心하고 令其衆曰 一甄敗어든 鳴三鼓하고 兩甄敗어든 鳴六鼓하라 自旦至申에 兩甄皆敗어늘 訪聞鼓音하고 選精銳八百人하여 自行酒飮之하고 敕不得妄動하고 聞鼓音乃進하라 賊未至三十步에 訪親鳴鼓하니 將士皆騰躍奔赴한대 曾遂大潰2)하니 此는 以佚待勞者也요 周亞夫平七國할새 堅壁拒守하고 絶吳楚糧道하고 待其飢疲하여 出兵擊之3)하니 此는 以飽待飢者也라

1) 吳起曰……可擊:이 내용은 ≪吳子≫ <料敵>에 보인다.

2) 晉周訪討杜曾……曾遂大潰:이 사례는 158쪽 주 2) 참조.

3) 周亞夫平七國……出兵擊之:90쪽 주 2)와 176쪽 주 1) 참조.

吳起가 말하기를 “적이 먼 길을 떠나와 새로 막 도착해서 行列이 아직 정해지지 못했으면 공격할 수 있다.” 하였으니, 이는 가까움으로써 먼 적을 기다리는 것이다.

晉나라 周訪이 杜曾을 토벌할 적에 장군 李常으로 하여금 左甄을 감독하게 하고 許朝로 하여금 右甄을 감독하게 하고는, 周訪이 중군을 거느리고서 깃발을 높이 세우고 직접 진영 뒤에서 꿩을 쏘아 맞혀 장병들을 안심시킨 다음, 장병들에게 명령하기를 “한 甄이 패하거든 세 번 북을 울리고 두 甄이 패하거든 여섯 번 북을 울려라.” 하였다. 아침부터 申時(15~17시)에 이르러 두 甄이 모두 패하자, 周訪은 북소리를 듣고서 정예병 800명을 선발하여 직접 술을 돌려 마시게 하여 사기를 진작시킨 뒤에, “함부로 출동하지 말고 북소리를 듣고 비로소 진격하라.”고 엄명하였다. 적군이 거의 30보 가까이 다가오자 周訪이 직접 북을 울리니, 장수와 병사들이 모두 날뛰고 달려가 싸워서 杜曾이 마침내 크게 패하였으니, 이는 편안함으로써 수고로운 적을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周亞夫가 吳․楚 7국을 평정할 적에 성벽을 굳게 수비하여 적의 공격을 막고, 吳나라와 楚나라의 군량 수송로를 차단하여 적들이 굶주리고 피곤할 때를 기다렸다가 출병하여 공격하였으니, 이는 배부름으로써 굶주린 적을 기다린 것이다.


無邀正正之旗하고 勿擊堂堂之陣이니 此는 治變者也라

바르고 정돈된 적의 깃발을 맞아 싸우지 말고 당당한 적의 진영을 공격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변화를 다스리는 것이다.

正正者는 旌旗整治也니 旌旗整治면 豈可邀之리오 邀之면 反爲彼所乘이요 堂堂者는 行陣盛大也니 行陣盛大면 豈可擊之리오 擊之면 反爲彼所勝이라 故로 正正之旗는 伺其隙而邀之 可也요 堂堂之陣은 候其便而擊之 可也니 此는 善治變化之道하여 以應敵人者라 前篇云 實而備之하고 强而避之 是也라

正正은 깃발이 정돈되고 다스려진 것이니, 적군의 깃발이 정돈되고 다스려지면 어찌 맞아 싸울 수 있겠는가. 맞아 싸우면 도리어 저들에게 공격을 당한다. 堂堂은 行陣이 성대한 것이니, 행진이 성대하면 어찌 공격할 수 있겠는가. 공격하면 도리어 저들에게 패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르고 정돈된 적의 깃발은 그 틈을 기다렸다가 맞아 싸워야 하고, 당당한 적의 진영은 편리한 틈을 기다렸다가 공격하여야 하니, 이는 변화하는 道를 잘 다스려서 적에게 대응하는 것이다.

앞 篇에 ‘충실하면 대비하고 강하면 피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故로 用兵之法은 高陵勿向하며 背丘勿逆하며 佯北勿從하며 銳卒勿攻하며 餌兵勿食하며 歸師勿遏하며 圍師必闕하며 窮寇勿迫이니 此는 用兵之法也니라

그러므로 用兵하는 법은 높은 언덕은 향하지 말고, 적이 언덕을 등지고 있거든 거슬러 싸우지 말고, 거짓 패하여 달아나거든 추격하지 말고, 적군이 정예하거든 공격하지 말고, 낚싯밥은 먹지 말고, 돌아가는 군대는 막지 말고, 적을 포위할 때에는 반드시 한쪽을 비워주고, 궁지에 빠진 적은 압박하지 말아야 하니, 이는 용병하는 법이다.

此는 本九變篇文이어늘 脫簡在此1)하니 下文에 乃詳辨之하니라

1) 此本九變篇文 脫簡在此:≪直解≫는 張賁의 註를 따른 것인데, ≪孫子髓≫에는 이를 비판하여 “무릇 옛글을 改竄(바꿈)하는 경우는 반드시 옛것을 따르면 말이 되지 않고 고치면 확실하여 의심이 없는 뒤에야 비로소 고칠 수 있으나, 오히려 의심스러운 것을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하다. ‘高陵勿向’ 이하의 여덟 가지는 모두 떳떳한 이치로서 이른바 ‘變’이라는 것이 없고, 더구나 九地의 變이 분명하니, 그렇다면 어찌 전혀 거리낌이 없이 떼고 붙일 수 있겠는가.” 하였다.

또 “諸家들은 반드시 이 한 편을 연속된 문자라고 생각하여 <軍政>의 形名 한 단락과 편 끝의 여덟 句를 억지로 <軍爭>에 끌어다가 맞추었다. 이 때문에 허다한 병통이 이로부터 생겨나서 문장을 이루지 못했다.” 하였다.

그리하여 ‘軍政曰’ 이하를 形名을 해석한 것으로 보고, ‘三軍可奪氣’ 이하를 形名을 인하여 일으킨 것이라 하였으며, ‘故用兵之法 高陵勿向’ 이하는 따로 한 단락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본래 <九變>篇의 글인데, 簡策이 탈락하여 여기에 있으니, 아랫글에 마침내 자세히 분변하였다.